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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는 웃으면서 웁니다

연극 <양덕원 이야기>
등록 2010-07-21 19:48 수정 2020-05-03 04:26
〈양덕원 이야기〉

〈양덕원 이야기〉

여름밤 실컷 웃었다. TV나 노트북 모니터 앞도 아니다. 만화책을 펼친 것도 아니다. 눈앞에 살아 있는 그 사람의 몸짓 하나, 대사 하나가 몸을 덜덜 떨게 만들었다. 장소는 서울 대학로. 그렇다고 지하철 입구부터 덤벼드는 무수한 ‘개그’와 셀 수 없는 ‘콘서트’의 삐끼들에 손목을 잡힌 것도 아니다. 뜨거운 여름밤, 대학로에서 땀이 쏙 빠지게 웃은 건 한 편의 연극 덕분이다. 이런 재미를 잊고 있었다는 게 참 부끄럽다.

극단 차이무의 는 대놓고 웃기는 코미디는 아니다. 사실 친구가 표를 구했다기에 쫄래쫄래 따라갔는데, 내용을 알았다면 결단코 안 갔을 것이다. 딱 나 같은, 시골 떠난 불효자들을 때리려고 만든 연극. 트라우마와도 같은 이야기다.

무대는 강원도의 어느 시골. 노환인 아버지가 3시간이면 눈을 감을 거라는 전갈을 받고 세 남매가 찾아온다. 그러나 3시간은 사흘이 되고, 석 달이 된다. 곧 떠날 것 같은 양복은 몸뻬와 체육복으로 바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 서로에 대한 묵은 불만들이 솟아나온다. 그런 불편함을 이겨내게 하는 건 간간이 떠오르는 즐거운 추억이다. 그러나 이 사람, 지씨 아저씨가 없었다면 나는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 같다.

송재룡이 연기한 지씨는 마을의 늙수구레한 장의사로 집안의 오랜 지기다. 아버지가 눈을 감는다니까 집에 오긴 했지만, 또 금세 떠날 준비를 하는 남매들이 그의 눈에는 마땅치 않다. 그래서 싫은 소리를 툭툭 내뱉지만, 그래도 본연의 정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서 하나둘 자신의 장기를 드러낸다.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이 남자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웃음 폭탄이다.

머리는 가발을 쓴 듯 연방 비뚤어진 걸 바로잡는데, 그래도 귀밑머리는 자기 머리라며 자랑을 해댄다. 형제를 놀려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추 한번 보여주면 10원 줄게”라고 한다. 당연히 거절. “그럼 천원, 그럼 만원.” 3만원까지 시세가 올라가니, 대뜸 “그럴까요” 하고 허리춤을 푸는 동생. 그러자 혼비백산 도망을 간다. 서로 알면서 치는 이런 농. 아버지의 죽음이 눈앞에 있기에 더 극적으로 보이는 유머다.

틈만 나면 원맨쇼를 펼치는 지씨. 그 진면목은 6·25 때 인민군 포로로 잡혔던 무용담을 풀어놓는 장면에서 나온다. “내가 총알을 피하잖아” 하면서 인민군의 따발총 세례를 피해 달아나는 걸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몸 개그는 압권이다. 몸에 난 점을 두고 총알이 뚫고 간 자리라며 뻥치는 장면은 민망함에 나까지 몸을 배배 꼬게 된다.

연극은 성급하게 화해를 시도하지 않는다. 적당한 시점에 배우들을 울려서 관객도 울리고, 그래서 극장을 나선 뒤 전화 한 통화 보내고 편히 잠들게 하지 않는다. 해결될 수 없는 현실. 그러니까 이런 유머가 더욱 필요한 것이다. 관객 중 한 명을 강아지 ‘독구’로 취급하는데, 그에게 라면 한 젓가락을 선사하는 장면은 의 ‘달인’에서 김병만이 거꾸로 매달려 라면을 먹는 장면보다 훨씬 웃기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찡했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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