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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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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광기와 혼란의 ‘송두율 극장’

힘자랑하는 근육질 국가, 집단과 개인이 부딪힐 때 주류 운동이 취하는 내면의 포즈…
옳고 그름 그 경계의 다큐 홍형숙의 <경계도시2>
등록 2010-03-12 13:40 수정 2020-05-03 04:26

돌아보면, ‘송두율 극장’이 있었다. 축구팬들은 예컨대 추가 시간에 골을 터뜨려 승부를 바꾸는 드라마틱한 경기를 많이 하는 팀의 경기에 ‘극장’이란 이름을 붙여준다. 지난 유로 2008에는 경기마다 명승부를 연출했던 터키팀의 ‘터키 극장’이 있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엔 ‘토트넘 극장’이 있었다. 2003년 9월, 한국에는 37년 만에 입국한 한 개인을 대한민국이란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한가운데 세워두고 지나온 인생을 발가벗기고 당장 여기서 무릎 꿇는 항복을 요구했던 광기의 극장이 있었다. 굳이 나누자면, 한국 사회 오른쪽이 광기로 번뜩였다면 나머지 왼쪽은 혼란에 빠졌다. 간첩이니 김철수니 하는 말들을 국정원의 고리타분한 선전이라 믿었는데, 어쨌든 믿었던 인물이 북한의 자금을 받았고 ‘김철수’란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렇게 보수 언론을 통해 포장돼 나온 ‘피의 사실’은 송두율 교수를 분단의 희생자, 양심적 철학자라 여겼던 이들에겐 적잖은 혼란을 주었다. 그것은 송두율 반전 드라마는 아니어도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미드처럼 보였다.

송두율 교수. 연합

송두율 교수. 연합

3주 일정은 7년 장정으로

그렇게 불타는 시간은 끝났다. 나중에 송두율 교수가 재판에서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단 사실을 일부는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후일담에 지나지 않는다. 광기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뇌리에 이미 그는 거물 간첩으로 낙인찍혀버렸다. 그렇게 멀어진 얘기를 7년이 흐른 지금에 다시 불러낸 사람이 있다. 홍형숙 감독은 고국 방문을 앞두고 설레고 방문이 무산돼 좌절하는 송두율 교수 부부의 얘기를 담은 를 이미 2002년에 만들었다. 앞서 홍 감독은 (1995), (1997), (1998) 같은 작품을 통해 ‘경계와 너머’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마침내 송두율 교수의 고국 방문이 성사되자 3주 일정으로 촬영에 나섰다. 그러나 3주의 일정은 7년의 장정이 되었다. 홍 감독은 “(는) 나와 그와 친구들 얘기”라며 “세 가지 축에 모두 거리를 두는 데 2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겨우 거리가 생기자 촬영 테이프 400개, 자료 테이프 100개를 보는 데만 또 2년이 걸렸다. 그는 “처음엔 힘들어 한 번에 10분도 보지를 못했다”고 돌이켰다. 그리고 2006년에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송 교수를 만났고, 그해 가편집본을 만들었다. 그것도 끝이 아니어서 송 교수를 포함해 다큐에 등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모으고 갈등을 조정하면서 마침내 완성본이 나왔다.

2003년 송두율 교수는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으나 결국 구속됐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선친의 묘소를 찾아 비로소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2003년 송두율 교수는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으나 결국 구속됐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선친의 묘소를 찾아 비로소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나온 에는 다양한 시선이 담겼다. 이 다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국 사회의 힘자랑. 체제 경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한국이란 근육질의 국가는 나한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입국의 문에서 한 철학자에게 무릎 꿇으라고 협박했다. 홍 감독은 “송두율 교수가 입국해서 출국하기까지 과정을 대략 4단계로 나누었는데, 영화는 처음 입국해서 국정원 조사를 받고 여론몰이를 당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한 철학자의 내면 고백을 강요했던 한국 사회의 광기가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홍 감독은 “국가가 한 개인에게 완전한 투항만을 요구했다”고 돌이켰다. 한편으론 그동안 알려진 내용과 조금씩 다른 사실이 나오면서, 송두율을 분단의 피해자로 믿었던 이들이 느끼는 혼란도 역시 혼란을 느끼는 감독의 시선을 통해 드러난다.

선의의 초청자들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

<경계도시2>의 홍형숙 감독은 다큐가 잊어선 안 될 과거를 기억하는 투쟁이 되기를 바란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경계도시2>의 홍형숙 감독은 다큐가 잊어선 안 될 과거를 기억하는 투쟁이 되기를 바란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뜨거웠던 2007년 가을의 내밀한 관찰자이던 홍형숙 감독의 카메라는 외부의 시선으로는 짐작만 했으나 들여다보지는 못했던 곳에도 이른다. 당시 사회단체 관계자 등으로 꾸려진 대책위 내부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가 에 생생히 담겼다. 이것을 보면서 또 다른 성찰의 계기도 나온다. 선의로 가득한 ‘관계자들’은 송두율 교수를 앞장서 초청했으나 이제는 거꾸로 그에게 독일 국적 포기를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른바 객관적 상황이 “수많은 사람들”과 “(송 교수 부부) 두 분의 인생”을 대비시킬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는 집단과 개인의 이해가 부딪힐 때 한국 사회의 주류 운동이 취하는 내면의 포즈가 포착된다. 그러나 여기엔 어떠한 판단도 들어 있지 않다. 누구는 송두율 교수 부부의 입장에, 또 누구는 관계자들의 고뇌에 공감할 것이다. 홍 감독은 송 교수를 생각하면 “저 자리에 그가 아닌 누가 있었다고 한들 (상황이)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관계자들을 보면서 “‘저 테이블에 내가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는 그렇게 여기와 저기, 옳음과 잘못의 경계를 명확히 나누는 다큐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어떠한 입장도 밝히기 어려운 송 교수를 대신해 경계인의 입장을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대변하는 부인 정정희씨의 주장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 같다. 홍 감독은 정정희씨에 대해 “대변자보다는 오히려 당사자”라고 말했다.

2004년 8월 마침내 항소심에서 일부 무죄판결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송두율 교수는 고향 격인 제주에 가서 바다에 발을 담그고 회한에 젖는다. 어쩌면 그에게 경계도시 서울로 들어오는 일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그에게 고향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송 교수는 일본에서 태어나 광주와 서울을 거쳤지만, 스스로 말하듯이 일반적 의미의 고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홍 감독은 “송두율 교수는 자신의 귀향은 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전에도 말했다”고 전했다. 황혼에 접어든 인생을 어디서 마무리하고, 어떤 삶의 거처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 철학자는 과거를 대면할 용기도 냈을 것이다. 그리고 변한 조국에 대한 희망도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미래의 고향으로의 귀거래사는 해피엔딩이 되지 못했다.

미래 고향으로의 귀거래사, 언해피엔딩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집단적 기억의 힘은 강하다. 그것을 굳이 ‘기억 투쟁’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기억하는 사회에 역사는 조금 다르게 반복될 여지를 열어준다. 그래서 홍 감독은 “몰랐거나 잊었거나 침묵에 묻었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사건이 끝난 지 7년 뒤에 용감하게 이 다큐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얘기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다시 여기 그와 같은 인물이 온다면 한국 사회는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인가?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홍 감독은 “나와 친구들의 고백록인 이 영화가 답답하고 서글픈 이야기를 넘어서 애타는 희망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3월18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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