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의 어느 해, 부모님이 내 생일에만 생크림 케이크를 사오고 열 달 뒤의 언니 생일에는 무식하게 넓적한 ‘맘모스빵’으로 케이크를 대신했던 적이 있다. 언니는 치사하게 먹는 걸로 편애한다고 생각했는지 두고두고 서운해했다.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노래도 부르고, 촛불을 끄며 박수를 치고, 곱게 썰어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 것으로 완성되는, 화려하고도 특수한 과정. 그것을 케이크 말고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특별한 날일수록 예쁜 것을 먹어야 한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쁠수록 기분은 훨씬 좋아진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이브 하루 전 친구와 예쁜 케이크를 만들었다. 어디서 만들었느냐면, 우리 집도 남의 집도 아닌, 최근 대학가 앞에서 은근히 유행 중인 ‘케이크 만드는 카페’에서.
카운터 앞에 있는 전단지에는 ‘온 가족이 케이크를 만들며 즐기는 신개념 공간카페!’라고 소개돼 있었는데, 실제론 ‘카페’와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공방’에 가까워 보인다. 음료를 팔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케이크의 사이즈와 맛, 크림 색깔을 선택해 사장님께 알린다. 사장님은 안경을 쓴 중년의 인텔리풍 아저씨다. 그는 냉장고에서 미리 만들어둔 스펀지케이크를 꺼내온다. 반을 갈라 시럽과 과일을 끼워넣고, ‘아이싱’(케이크 표면에 크림을 균일하게 펴바르는 기본 작업)을 시작한다.
나는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되셨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케이크 위에 새하얀 크림을 솜씨 좋게 ‘쓱싹’ 바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로를 설계하는 일을 했는데, 돈은 많이 벌었지만 너무 바쁘고 스트레스도 극심해서 10년 가까이 하루에 2~3시간밖에 못 잤다고 한다. 그래서 관두고 이 가게를 차렸다는 것이다. “장사가 잘돼서 좋으시겠어요.” “연말연시니까요. 그래도 아직 부침이 심해요. 어떤 날은 파리 잡기도 하고. 그럴 땐 내가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케이크를 만들러 온 손님들은 토악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욕을 하지도 않고, 모두 밝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건 좋죠.”
우리는 사장님한테서 새하얀 크림옷을 입힌 케이크와 핑크색 크림이 든 주머니를 받아들고 자리를 잡는다. 하얀 테이블이 여남은 개 놓여 있고, 거기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케이크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한 커플은 어떤 디자인으로 꾸밀지 생각 중인 듯, 카페에 비치된 케이크 사진집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한 여대생은 케이크 위에 신중히 글씨를 쓰고 있다. 중년 아저씨는 휴대전화 카메라로 다 완성한 케이크를 찍는다. 교복 입은 상큼한 여고생 네 명이서 커다란 케이크 하나를 함께 장식하고 있다. 옆 테이블에서는 미소년 둘이서 카트라이더 자동차 모양의 케이크를 거의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슬쩍 “저기요!” 하고 말을 걸어본다. 한 소년이 놀라서 쳐다본다. 집적거리는 이상한 누나로 보이지 않게, 되도록 개그우먼 김신영스러운 ‘엄마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묻는다. “누구한테 주려고 그렇게 예쁘게 만들어요?” 소년은 수줍어하며 대답한다. “친구 남동생이 재롱잔치를 하거든요. 그래서 어린이집에 가져갈 거예요.”
남의 케이크에 관심을 쏟던 우리는 정작, 둘 다 왕년에 미술 좀 해본 사람이랍시고 스케치까지 하며 갖은 개폼과 유난을 떨다가, 결국 1시간30분이 걸려서야 완성을 했다. ‘산타와 눈사람과 트리를 각자 어디에 꽂는 게 황금 비율인가’ ‘케이크에 과일을 올릴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메시지를 새길 것인가’ 등의 문제를 결정짓는데 장시간 토론이 필요했다(이건 뭐, 거의 입으로 만들었다). 스케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케이크가 나왔지만 그래도 뿌듯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거 아까워서 도저히 못 먹겠다.” “완전 아방가르드한 케이크다. 우리 좀 천재 아니야? 우하하.”
빵집에서 3만원쯤 할 만한 사이즈의 케이크를 직접 만드는 데 든 비용은 기본 베이스 카스텔라빵 2호 사이즈 1만2천원, 딸기크림 비용 추가 1천원, 각종 장식물과 부재료 5500원, 총 1만8500원이었다. 케이크를 꾸미는 달달한 시간?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과 정다워지기에 좋은 놀이였다.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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