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원. 마트 장바구니에 생필품 몇 개 넣었을 뿐인데 가뿐히 넘기곤 하는 그 액수. 친구들과 시내 나가서 술 한 번 먹으면 티도 안 나게 홀랑 사라지는 그 액수. 남의 경조사에 이 정도는 내야 부조했다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그 액수. ‘김밥천국’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느껴지지만 ‘빕스’ 가서는 요 정도면 얼마 안 나왔네 할 수 있는 그 액수. 어떨 땐 너무 큰돈이다가도 어떨 땐 별거 아닌 듯 느껴지는 그 액수. 그런 3만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재미난 일은 뭐가 있을까? 친구 B가 말했다. “모텔을 가. 그 값에 숙박 되는 데는 별로 없지만… 대실은 어디든 할 수 있잖아.” 가장 원초적인 오락을 하는 게 재미야 있겠지만, 4시간이 지나기 전 방을 비워주기 위해 좀전까지 뜨거웠던 연인들이 각자 묵묵히 옷을 주워 입고 후딱 나가는 광경은 서글프고 허무하다. 아아, 3만원으로 할 수 있는 즐겁고 생산적인 일이 뭐 없을까? ‘3만원 프로젝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3만원으로 너도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졸업하고 어쩌다 가끔 가는 학교의 엘리베이터 옆에 ‘제2회 3만원 프로젝트의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하얀 A4 용지 반쪽을 잘라 붙인 그 광고는 너무 수수해서 오히려 튀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왜 1만원도 5만원도 아닌 ‘3’만원짜리 프로젝트냐 하면, 학교 식당에서 일주일 동안 식권을 사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액수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으로 뭔가 새로운 걸 만들거나 해본다는 것, 그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이자 의의다. 신청한 사람에게 선착순으로 금액을 지원하며, 선정된 이는 그 3만원을 갖고 전시가 가능한 무엇이든 해내면 된다. 사용금액 영수증과 내역서, 남은 돈은 결과물과 함께 전시한다. 배후세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나는 “어, 이거 재밌겠다. 나도 신청해볼까~” 하다가,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같은 과 선배가 여기에 참가했다며 구경을 오라는 거다. 날이 좀 춥지만 보러 갔다. 사실, 다들 도대체 3만원으로 뭘 어떻게 해놨을지 하도 궁금해서.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앞 어느 빌딩 지하의 조그만 갤러리. 참가자는 10명쯤, 전부 한예종 재학생이었다. 미술 공부를 하는 이보다는 다른 공부를 하는 이들이 다양하게 참여한 듯했다. 3만원을 다 쓴 사람도 있고, 100원 더 쓴 사람도 있고, 잔돈을 남겨서 작품 옆에 쌓아둔 사람도 있었다. 단순히 3만원을 재료비로 써서 뭘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3만원을 사용한 과정 자체를 작품화해 3만원 이상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들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얘기해주겠다. 새하얀 정사각형의 단 위에 온갖 색깔의 다른 맛의 ‘츄파춥스’ 사탕이 수십 개 흩어져 있다. 그 뒤의 흰 벽에는 150장의 영수증이 붙어 있다. 영수증마다 찍혀 있는 금액은 전부 200원, 품목은 츄파춥스, 수량은 1개다. 작품 제목은 다. 그는 학교 근처와 갤러리 일대를 돌며 150군데의 편의점과 슈퍼에서 한 번에 한 개씩 츄파춥스 150개를 샀고, 영수증 150장을 모았다. “사탕은 관람객 여러분께 드리는 선물이니 하나씩 가져가세요.” 이 메시지를 읽은 나는 신중히 사탕을 고른다. 파인애플맛으로. 두 개 챙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양심적으로 딱 하나만 챙긴다. 불현듯 드는 의문. 정말 이게 진짜 사탕일까? 나중에 까보면 사탕이 아니다, 라는 반전이 이 작품의 진짜 의도는 아닐까?
지금 이 글을 쓰다 멈추고 사탕을 까서 핥아본다. 진짜 사탕이다. 사탕을 혀로 천천히 녹이며 생각한다. 추운 겨울날, 150개 편의점을 돌아다녔을 그의 마음을. 알고 보니 그는, 3만원 프로젝트의 이번 회 기획자란다. 앞으로의 3회와 4회에는 재학생에 국한하지 않고 학교 밖까지 확대해 다양한 사람들과 작업을 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3만원 프로젝트’에는 3만원어치를 뛰어넘는 반짝임이 있다. 아, 처음이다. 이렇게 달디단 츄파춥스는.
한혜경 ‘손바닥 문학상’ 수상자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어떻게 2년 반을 더”…학부모·해병·교수·노동자 이은 ‘촛불 행렬’
에버랜드가 50년 공들인 ‘비밀’…베일 벗자 펼쳐진 장관 [ESC]
[영상] 광화문 선 이재명 “난 죽지 않는다”…촛불 든 시민들, 이름 연호
‘58살 핵주먹’ 타이슨 판정패…30살 어린 복서는 고개 숙였다
‘10도 뚝’ 찬바람 부는 일요일…다음주 서울은 영하 추위
130쪽 이재명 판결문…법원, ‘백현동 발언’ 당선 목적· 고의성 인정
‘정년이’ 김태리 출두요…여성국극, 왜 짧게 흥하고 망했나
‘트럼프 없는 곳으로 도피?’…4억이면 4년 동안 크루즈 여행
[영상] “속상해서, 정작 죄 있는 사람은 뻣뻣한데”…비 내리는 광화문 메운 시민들
러시아, 중국 에어쇼에서 스텔스 전투기 첫 수출 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