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시차가 줄었다. 문화적 시차 말이다. 따끈한 미드(미국 드라마)가 한국에 ‘동시 방영’되고 있고, 미국산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한국판’이 전파를 탔고, 가요는 미국의 빌보드 차트와 발맞춰간다. 물론 미국의 대중문화 지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차 대전 이래로 유럽부터 한국까지 미국화(Americanization)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패권이 위축되는 가운데 미국의 대중문화 헤게모니는 오히려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최소한 가가호호 케이블(1530만 가구)과 위성(230만 가구) 방송 시대를 맞은 한국에선, 미국 대중문화의 강세가 역력하다. 지금 미국은 케이블을 타고 오고, 인터넷은 시차를 당겼다.
인터넷·케이블이 좁힌 ‘문화적 시차’
요즘 케이블 채널을 켜면 ‘동시 방영’ 자막이 눈에 띈다. ‘슈퍼액션’은 시즌5를, ‘채널 CGV’는 시즌5를, ‘캐치온’은 시즌4를 미국과 ‘동시 방영’한다고 알리는 자막이다. 사실 미국 현지 방영과 서너 주 시차는 있지만, 미국에서 한 시즌이 끝나면 한국에서 방송하던 예전과 사뭇 다르다. tvN도 ‘퍼스트 클래스존’을 통해 따끈한 미드를 월~목요일 날마다 방영한다.
tvN 이덕재 채널팀장은 “워낙에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미드를 많이 봐서 최대한 시차를 당길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다운로드 속도를 자랑하는 한국 현실은 이렇게 시차를 당겼다. 올해엔 미국판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 의 포맷을 정식 수입해 만든 는 2% 시청률을 기록했고, 미국의 오디션 프로 의 영향을 받은 는 6%가 넘는 케이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다.
그렇다면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서 미국이 이겼다? 이명석 대중문화 평론가는 “일본이 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이 이겼단 말은 한국이 졌다기보다는 일본이 졌다를 뜻한다. 1990년대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모델로 일본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경합했지만, 이제는 미국이 승리했단 것이다. 룰라의 가 일본곡 ‘완전’ 표절로 밝혀지던 ‘쌍구년도’는 진작에 거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유학생이 일본 오락프로 편집본을 만들어서 한국 PD에게 보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얘기도 옛날 얘기다.
미국에서 시청률 지존인 의 한국적 번역인 의 성공은 한국에서 비로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안착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방영된 오디션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반인 가운데 ‘아이돌’이 될 만한 사람을 뽑는 은 아메리칸드림의 압축판. 실제로 여기서 켈리 클락슨, 제니퍼 허드슨 같은 ‘백만장’ 가수가 나왔다. 는 일반인 가운데 스타가 될 재목을 뽑고, 시청자가 투표로 우승을 결정하는 뼈대부터 을 닮았다. 여기에 전국을 지역별로 나눠 돌면서 오디션을 하되 웃기는 인물을 부각해 화제를 모은다, 심사는 3명이 하되 1명은 여성이고 독설은 기본이다, 전설적 가수의 노래를 과제로 준다, 이렇게 나열하기 벅찬 유사성이 있다. 다만 는 에 견줘 참가자의 어려운 과거를 꺼내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인간극장’에 가깝다. 지금은 의 시대다. 가까운 대만·중국에서 머나먼 독일·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이름만 달리한 은 지구촌 어디에나 있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에 ‘뒷담화’가 나와야 흥미를 더하는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한국적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점잖은 ‘체하는’ 한국인 출연자는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기 꺼리고, 시청자도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느새 세상은 변했다. 디자이너들이 상금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에서는 예전과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예고편부터 출연자끼리 서로를 ‘까는’ 모습이 나오더니, 급기야 출연자 여럿이 한 명을 ‘왕따’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상호 PD는 “20대는 솔직하다. 유학파 출신은 더욱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포맷에 대한 판권을 주고 사온 최초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격세지감, 뒷담화의 시대를 열었다. 백은하 편집장은 “지금의 10~20대는 부정적인 의견을 방송에서 말해도 생각만큼 나쁜 방식으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습득한 세대”라고 평가했다. 미국화의 영향력은 개별 프로그램 차원을 넘어선다. 이명석 평론가는 “단순히 원색의 화면뿐 아니라 팍팍 찌르며 바뀌는 장면 전환, 짧게 끊어치는 대사, 강렬하게 깔리는 음악에서 미국 MTV 영향이 확연히 드러난다”며 “이런 때깔이 엠넷(Mnet)을 비롯한 세련된 케이블 채널의 어법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산도 태평양을 건너면 변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한류’를 자랑하는 한국의 문화적 번역 능력은 만만치 않다. 이제는 처럼 한국화에 성공한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나오고 있다. 백은하 편집장은 “는 의 21세기 버전으로도 보인다”며 “미국적인 맛이라기보다는 ‘좀 달게 만든 김치찌개’처럼 요즘 세대 입맛에 맞춘 한국산”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미국과 한국이 뒤섞이는 문화적 혼성도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팬시화된 리얼리티’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다. 이명석 평론가는 “여전히 험담도 화해를 위한 과정”이라며 “도 시청자를 울리려는 한국 소녀의 감수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산보다는 문화적 혼성에 가깝기도2000년대 중반 ‘뉴욕’의 시대가 있었다. ‘온스타일’(Onstyle)에서 뉴욕 30대 독신녀들이 주인공인 를 방영하면서 뉴욕과 패션의 시대가 열렸다. 그래도 당시는 정치적 올바름을 배려하는 ‘생각 있는’ 속물의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싫은’ 시대로 변했다. 요즘 인기인 에는 바람을 피우는 남자가 얼굴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철없는 ‘된장녀’의 좌충우돌을 담은 는 시즌6을 이어간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는 “최근의 흐름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핵심인 냉소주의가 깔려 있다”며 “너나 나나 똑같이 어차피 속물인데 뭘 따지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엄기호 연세대 강사(인류학)는 “생존을 제외한 다른 대의는 없다는 신자유주의 삶의 양식의 전면화”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사생활도 인터넷, 방송을 통해서 전시하는 노출증이 이제는 보편적인 인정투쟁 방식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MTV의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면, 냉소주의 프로그램은 계몽과 훈육을 통해서 인간을 바꾸는 근대를 죽였다는 것이다. 다른 견해도 있다. 백은하 편집장은 “그래도 요즘 10~20대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안다”며 “시선의 감옥에 갇혀서 살아온 기성세대와 다르다”라고 말했다.
미드는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황금기를 맞았다. 케이블만 켜면 어디서든 한 군데는 방영되는 미드는 장르적 전통을 비틀면서 진화했고, 선악을 넘어선 인간관을 담으며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이명석 평론가는 “지금 지구촌 대중문화의 핵심은 미국 영화도, 일본 만화도 아닌 미국 방송”이라고 평가한다. 미드는 한국 드라마에도 영향을 주었다. 백은하 편집장은 “2007~2008년에 의학드라마 등 장르 드라마가 나온 것은 미드의 영향”이라고 말했다. (2007)는 장르적 공통점 외에도 주인공 캐릭터, 이혼남과 사랑에 빠지는 설정 등에서 와 닮았단 비판을 받았다. 등을 쓴 강은정 작가는 “미드는 ‘여러분 진지하게 보세요’라고 강요하지 않고, 철학도 달콤한 사탕으로 포장해 보여준다”며 “빠른 장면 전환 기술이나 추측이 불가능한 전개 등에서 배울 점이 적잖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지은 기자는 “미드에 익숙한 사람은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기시감’을 느낀다”고 전했다.
문화는 내면에 스민다. 더구나 일본적인 것은 ‘왜색’으로 비판받지만, 미국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최지은 기자는 “의 집사 설정은 왜색으로 비판받지만, 미국식 설정에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한국예술학)는 “일본 대중문화가 무국적이라고 하지만 한국은 더욱 무국적”이라며 “아시아에서 가장 미국화된 나라가 한국”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미국 시트콤 등은 학원 등에서 영어 교재로 쓰인다. 이택광 교수는 “과거에 영문학이 했던 역할을 이제는 미드가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드의 수요는 한정돼 있다. 보수적 가족주의로 귀결되기 십상인 한국 드라마에 공감하기 어려운 20~30대 비혼자들이 주로 미드에서 위안을 얻는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긍정할 근거를 등에서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취향의 양극화가 강화된다. 백은하 편집장은 “미드를 보는 사람은 미드만 보고, 막장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막장 드라마만 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양극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한국적 빈곤도 있다. 백 편집장은 “미드를 벤치마킹한 2007~2008년의 드라마들이 크게 성공하지 못해 2009년엔 과거 회귀적 드라마가 많아졌다”고 분석했다. 미드가 끼치는 영향도 하나로 말하긴 어렵다. 듀나 영화평론가는 “무수한 미드는 저마다 다르고, 하나의 작품도 결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담지 않는다”며 “예컨대 은 자본주의가 붕괴돼 화폐도 없어진 우주를 무대로 삼지만, 가장 미국적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대중음악의 빌보드화 경향도 강해졌다. 여기엔 인터넷뿐 아니라 클럽문화도 영향을 끼쳤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21세기 들어 인터넷으로 팝음악 파일을 다운받고, 클럽에서 이런 음악을 다시 듣는 사람이 늘었다”며 “이들의 몸이 미국팝의 트렌드에 맞춰졌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팝 흐름에 민감하고 클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YG엔터테인먼트 같은 기획사가 순식간에 주류로 떠올랐다. YG는 빅뱅과 2NE1를 통해 대세를 주도하고 있다. JYP엔터테인먼트도 원더걸스를 통해 미국 진출을 시도할 만큼 팝과 관련이 깊다. 심지어 그래도 일본식 매니지먼트의 전통이 강했던 SM엔터테인먼트조차도 동방신기의 처럼 외국인에게 작곡을 맡긴다.
강명석 평론가는 “중간 템포 발라드인 소몰이 음악에 팝적인 리듬을 살짝 깔아주는 정도로는 대중이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요가 급변했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는 “갈수록 가요가 팝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YG의 음악적 중추로 2NE1의 (I don’t care), 태양의 등을 만든 프로듀서 테디처럼 미국에 오래 살았거나 아예 재미동포 출신이 히트곡을 양산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 같으면 ‘빠다’ 냄새가 너무 난다고 외면을 받았을 음악이 주류가 된 것이다.
영화계는 사회적 메시지 대신 볼거리에 치중한국과 미국의 차트가 따로 놀던 시대는 거했다. 누가 먼저 팝 트렌드를 감지해서 빨리 가요에 적용하느냐의 경쟁이 심화됐다. 대중이 창작자 못지않게 최신 팝을 접할 기회가 늘면서 표절 논란도 늘었다. 대중의 감식안이 비슷한 노래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는 “주류 가요는 짝퉁 가방 같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팝과 비슷한 가요를 들으며 “이건 빌보드에 오른 노래보다 나은데”라는 말도 나올 정도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빅뱅 이후의 3세대 아이돌은 팝음악을 한국화해 국민가요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지적한다. 팝만을 따라 하던 아이돌 스타의 팬이 10대 위주로 소수화됐던 현상을 다시 ‘현지화’를 통해 극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작가도 “이문세, 신승훈 같은 한국적 색깔이 강한 음악의 위세는 현저히 줄었다”고 말했다. 복고풍 팝에 기반한 원더걸스의 가 미국으로 역수출돼 빌보드 차트에 오른 것처럼, 팝음악을 현지화하는 일부 기획사의 능력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미국문화를 수입하되 아시아적 감수성으로 변형하는 한국 대중문화의 저력은 한류의 바탕이 되었다.
영화에선 할리우드의 영향이 ‘1천만 관객’ 영화의 코드 변화로 나타난다. 강명석 평론가는 “ 이후로 정치적·역사적 맥락이 약한 작품이 크게 흥행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메시지는 약하고 볼거리를 강조하며 스타가 ‘떼지어’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문법의 가 1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 코드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1천만 관객 영화엔 한국적 맥락이 강했다. 처럼 역사와 관련이 있거나, 같은 사극이 그러했다. 그러나 같은 2009년의 흥행작은 이전에 견줘 사회적 코드가 약하다. 남다은 영화평론가는 “영화가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볼거리로 여겨지는 현상과 결합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라며 “할리우드 영화처럼 익숙한 이야기는 용서가 되지만, 허술한 기술력은 용서하지 못한다는 관람 풍토가 강해졌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산업으로서 영화가 강조되면서 미국화의 강화로 이어졌다.
어쩌면 미국이 아니라 영어가 이겼다, 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터넷은 미국 문화의 전도사가 되었다. 전 국민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21세기가 열리면서 미국화는 날개를 달았다. 강명석 평론가는 “미국 문화의 수요는 있었지만 공급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인터넷을 통해 공급의 통로가 확 열렸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백은하 편집장은 “공급자가 없어도 수용자끼리 교류가 이뤄지는 전세계 공유의 시대”라고 덧붙였다. 만국어의 지위를 선점한 영어는 미국 문화 확산의 기반이 되었다. 일본·중국 문화보다 미국 문화가 인터넷 친화적인 이유다. 강 평론가는 “대니얼 헤니, 데니스 오 같은 혼혈인이 4~5년 전에 한국에 데뷔하면서 서구형 마스크를 가진 남성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며 “당시는 의 인기가 한창 무르익었고, 패리스 힐턴이 화제가 된 시기였다”고 덧붙였다. 서서히 동영상 서비스의 중심도 유튜브로 옮겨갔다.
미국의 속물성과 한국식 보여주기가 결합하면…그리하여 ‘문화적 무국적 세대’가 자라고 있다. 백은하 편집장은 “여권상 국적이 없으면 15살 한국 아이와 미국 아이가 문화적으로 그렇게 다를까 싶다”며 “문화적 국경이 낮아진 상황에서 자라난 이들은 코즈모폴리턴이란 선언을 굳이 하지 않아도 이미 감수성은 세계인”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드라마든 영화든 음악이든 ‘메이드 인 어디’를 따지지 않고 그저 재미있으니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심 섞인 전망도 나온다. 강명석 평론가는 “건전한 보수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미국의 장점이나 비판 철학은 잘 들어오지 않는다”며 “속물화된 미국의 대중문화에 한국식 보여주기 문화가 결합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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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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