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에겐 소설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바야흐로 이야기는 본명으로 시작한다. “여수에 황준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설가는 ‘형’이라 불렀고 사람들은 아무리 빨아도 제 색깔로 돌아갈 것 같지 않은 옷을 입은 그를 ‘거지’라고 불렀다. 담배도 풀빵도 서너 개씩 줘도 하나면 족한 황씨는 직업의식이 투박한 이였다. 약수터에서의 깊고 긴 울음을 본 이틀 뒤, 우연히 길에서 만난 황씨와 소설가는 단골 술집으로 간다. 술집 주인은 다음에는 데리고 오지 말라는 눈치다. 뭐든 하나면 족한 황씨도 술은 마다하지 않았다. 둘은 술동무가 되었다. 약수터에서 술을 마신 날 황씨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소설가는 고백을 하라고 부추겼다. 며칠 뒤 과연 고백을 했느냐고 묻자, 했단다. “저, 저기요”라고 말을 붙이고, “제, 제가 정말 좋아하거든요” “당신과 같이 자고 싶어요”라고 풀어놓았단다. 그 말을 들은 교복 입은 여학생 답은 이랬단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고등학생이거든요. 반년만 더 다니면 졸업해요. 그때까지만 기다리실래요?” 소설가는 황씨랑 밤새 술을 마시고 여학생을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 같이 갔다. 자다 깨다, 황씨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있는 여학생은 소설가의 동생이었다.
소설가 한창훈이 첫 산문집 (중앙북스 펴냄)을 냈다. 여행집은 있었으나 ‘산문집’이라는 타이틀로는 처음이다. 한창훈이 옮기는 대로 한창훈은 “변방의 삶을 그들의 언어로 쓴 소설이 나오면 으레 고색스러운 방 하나에 한꺼번에 모아놓고 체크인해버리는 게 요즘 풍토이다. 토속적이다, 질펀하다, 한마디 내뱉어주면 된다고 여기”는 문학판 속에서 ‘질펀한’ 자리를 하나 잡고 소설가를 하고 있다. 등을 썼다. 전남 여수의 거문도에서 나서 여수로 10살 때 이사를 하고 전국을 떠돌며, 주로 바닷가에서 어부로 또는 홍합 공장서 일하고 질통 들고 ‘아시바’를 오르며 지내다가, 서울에서 작가회의 사무국장도 역임했다, 다시 거문도에서 밥상에 올릴 고기를 낚으며 살고 있다. 한창훈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바다 소나(사나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박상륭은 “돌고래”라 하고, 공선옥은 “글만 쓰기에는 지나치게 튼튼하고 멋있는 외모”를 지니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책은 온갖 군상이 명멸하는 사람의 향(饗)연이자 그들이 남긴 향(香)연이다. 아등바등 살다 떠나고 아등바등 살며 사랑하는 꼴을 보는 소설가의 눈이, 섬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처럼 지혜롭다. 1부는 거문도에서 나서 거문도로 돌아가기까지 인생 궤적을 갈지자로 읊는다. 2부는 소설가와 시인들을 주로 ‘술’을 주제로 얽었다.
소설가의 친구에게도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것도 본명으로 시작한다. 소설가의 친구는 시인 유용주다. 거쳐온 직업을 대다 보면 한창훈이 한 수 밀린다는 ‘노동시인’이다. 이이가 조치원 이바돔 레스토랑 지배인으로 내려가 그로기 상태로 비틀거리고 있을 때 대단한 여대생을 만난다.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대학의 학생에 어디 가나 미인 소리를 듣고 늘씬하고 재봉질과 정리 수납의 황녀다. 8살 연상의 레스토랑 지배인이 “아저씨는 네가 사귈 만한 사람이 못 돼”라고 이야기해도 달라붙는다. 소설가는 이를 하늘은 인간을 뒤섞어 관계의 평균치 만들어놓기를 좋아해서라고 말한다. 예방주사 한 번 맞아보지 못한 무균의 처녀가 잡균의 사내를 만나버렸단다. 이런 기이한 일들이 소설가 주변에는 뻔질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귤나무에 귤을 달았더니그 이유를 다시 삶의 군상을 읊는 3부의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유난히 화초를 잘 키우는 할머니. 시들시들한 녀석도 소생해 꽃을 피우곤 한다. 그런데 선물로 받은 감귤나무만은 그러지 못했다. 꽃만 무성하고 귤나무에 탱자나무만 한 것 하나 열리지 않았다. 어느 날 할머니 댁에 갔더니 큼직한 귤 두 개가 떡하니 열렸다. 감탄하였으나 대꾸가 이상해 다시 살피니 귤을 실로 매달아놓았다. 그런데 그 다음해 나무는 귤을 잔뜩 만들어낸다. 소설에 삶의 비기가 담겼고, 삶에 소설의 비기가 담겼다. 소설 같은 삶의 비기가 가득한 산문집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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