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중세적 세계의 형성’, 이시모다 쇼 지음, 김현경 옮김,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
그리 머지않은 옛날, 역사책이라면 으레 머리말에 엄숙한 선언을 박아 넣던 시절이 있었다. 가령 한국 근현대사 연구서라면 “20세기 한국은 반제반봉건 혁명을 이룩하고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있었다”고 시작하는 식이다. 지금 보면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역사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된 건 저런 선언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이시모다 쇼의 ‘일본 중세적 세계의 형성’(원제는 ‘중세적 세계의 형성’)은 역사학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웅변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20세기 일본의 전설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전후에는 그동안 소외됐던 민중의 역사를 그들이 직접 쓰게 하자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으로 치면 백남운과 강만길의 역할을 한 사람이 해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책은 어떤 면에선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처럼, 어떤 면에선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처럼 읽힌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거대이론에 매몰돼 작은 것을 무시한다는 통념과 달리, 이시모다는 시종일관 ‘구로다장’(黑田莊)이라는 산간지대의 작은 장원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일본 중세적 세계의 형성’이 그저 그런 지역사나 향토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구로다장은 고대를 상징하는 세력인 거대 사찰 ‘도다이지’(東大寺)와 중세를 상징하는 세력인 무사단의 혈투가 벌어지는 역동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광고
수탈적인 관료들의 본거지인 도시에서 기원한 도다이지와 달리, 무사단은 농촌에서 성장했으나 농촌을 뛰어넘는 시야와 가능성을 지녔다. 이들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서 중시하는 ‘사적 소유’를 확립할 존재이지만, 안타깝게도 무사단은 끝내 도다이지에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구로다장이 아닌 일본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마치 뱀에게 먹히지만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자식을 퍼뜨리는 두꺼비처럼 무사단은 내부로부터 사찰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도다이지 역시, 일종의 ‘안티히어로’라 할 수 있는 무사 출신의 강도 집단인 ‘악당’의 소요를 견디지 못해 무사단의 보호를 요청하며 몰락하고 만다. 이시모다에 따르면, 이는 악당의 승리가 아니라 도다이지의 패배다. 고대는 스스로의 논리로는 새롭게 등장하는 갈등과 모순, 무엇보다 인민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에 중세에 자리를 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중세적 세계’란 무엇인가? 이시모다에게 중세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발전단계 중 하나 정도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공습을 피해 암막을 친 방에서 한 달 만에 초고를 써내려가며, 그는 천황제에 종속돼 저항 의지조차 상실한 일본 인민을 떠올렸다. 외부와 고립돼 대다수의 농민이 도다이지의 노비로 착취당하는 구로다장은 당시 일본에 대한 은유였던 셈이다.
중세적 세계란 곧 국민의 발견, 국민과의 생생한 연관이라는 이시모다의 얼핏 생경한 정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금지된 전시 상황 속에서, 그는 중세라는 우회로를 통해 일본 인민이 천황제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우뚝할 수 있는 국민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이는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지도, 역사학의 본령에 충실하지도 못한 설익은 문제의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문제의식 덕에 이시모다의 책이 ‘고전’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읽힌다고 말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광고
유찬근 대학원생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큰 그림 만들자” 통일교-건진법사 대화에 관저 용역 ‘희림’까지 등장
조국 “윤석열이 괴물된 건 책 안 읽었기 때문”
[단독] 진화위 직원들, 실명으로 ‘5·18 폄훼’ 박선영 사퇴 요구
줄줄이 대기 중인 백종원 예능, 더본코리아 논란에도 강행할까
조희대 대법원장은 심사숙고해야 한다 [아침햇발]
바티칸 밖, 약한 자들의 배웅 받으며…교황은 잠들었다
이재명 대세론 떠받치는 ‘이재명 불가론자들’
[현장] 불안한 SKT 이용자들…“사고 치고, 수습은 고객에 맡겨” 분통
소녀시대 수영, 존 윅 스핀오프 ‘발레리나’ 출연
간부 딸 결혼식서 ‘꽃가마’ 들었다…코레일 직원들 가마꾼 동원 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