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타올랐던 광장이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는 놀이마당으로 변한다. 지난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던 인권영화제가 올해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권영화제가 열리는 6월5일부터 7일까지 영화 스크린이 서울 청계광장의 밤을 밝히며 사람들에게 놀이터를 제공할 예정이다. 올해의 주제는 ‘표현의사(死)-나는 영화, 자유를 찾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표현의 자유’를 알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약자에 주목해온 영화제답게 빈곤층·성소수자·장애인 문제 등을 담은 국내외 영화들을 상영할 계획이다. 영화제 총기획을 맡은 인권운동사랑방 김일숙씨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꽃을 피우기 위한 난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인권영화제에는 여느 해보다 많은 출품작들이 접수됐다. 국내외 작품을 합쳐 지난해보다 2배 정도 많은 80여 편의 영화가 영화제 사무실에 도착했다. 출품작 수가 늘어난 이유가 지구촌 곳곳에서 다양한 인권 문제가 벌어진 탓인지, 영화제의 위상이 높아져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눈에 띄는 건 빈곤과 양극화, 노동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특히 많아졌다는 점이다.
출품작이 늘어난 것과 달리 상영 작품 수는 줄었다. 청계광장을 사흘밖에 쓸 수 없어 7일간 열리던 영화제는 올해 사흘 일정으로 축소됐다. 이 때문에 총 28편의 영화가 한 번씩만 상영된다. 요일마다 각각의 주제로 묶어 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라 관심 있는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들을 골라보기에 좋다.
개막작은 용산 참사 문제를 다룬 다. 개막작을 시작으로 영화제 첫날인 6월5일은 빈곤을 심화시키는 자본과 국가의 모습을 고발한 작품들을 상영한다. 언론단체 ‘민주주의를 위한 버마의 목소리’가 버마 독재 정권의 실상을 고발하는 , 등록금 문제를 통해 대학생들의 경제적 빈곤을 얘기하는 등이 볼 만하다.
6월6일의 주제는 ‘평화와 여성’이다.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과 성소수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준비돼 있다. 한 팔레스타인 가족의 일상을 담은 , 지난 18대 총선 때 ‘한국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후보’로 국회의원에 도전했던 최현숙씨의 선거운동을 기록한 등은 놓치면 후회한다.
마지막 날엔 이윤의 논리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의 삶과 아동노동 착취의 현장을 담은 작품들이 공개된다. 세계 기타 시장에서 판매되는 기타의 30% 가량을 만들어온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부당 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모습을 기록한 ,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10대 소년들의 이야기인 등이 상영된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자립형 공장’을 일궈내는 아르헨티나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기록한 폐막작 까지 스크린을 채우면 영화제는 끝이 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인권영화제의 투쟁은 계속된다.
극장이 아니라 거리로 나온 이유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인권영화제의 거리 상영은 알고 보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촛불의 작은 불씨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인권영화제는 의미가 깊지만 내년을 장담할 수 없다. 마로니에공원에서 청계광장으로 왔듯 내년에는 어느 거리에서 열릴지 불투명하다. 총기획자 김일숙씨는 “영화제를 열 극장이 없어 올해도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촛불의 힘이 모였던 광장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 한다”고 말했다.
‘영화제의 천국’인 우리나라에서 영화제를 열 극장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인권영화제가 열렸던 지난 세월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올해로 13회째인 인권영화제는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의 현장이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의 인권 감수성을 높여왔다. 관람료는 공짜인 비영리 영화제다. 인권영화제가 지키는 원칙 중 하나는 인권이란 이름으로 모든 심의나 검열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극장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에 따라 영화등급위원회의 사전심의를 통해 등급 판정을 받아야 한다. 등급 분류를 받지 않은 영화는 극장 상영을 할 수 없다. 인권영화제가 극장으로 가지 못하고 거리로 나온 이유다. 그렇게 대학가에서 시작한 영화는 2001년부터 불법인 줄 알면서도 공간을 내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의 도움으로 극장에서 영화제를 열어왔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극장주들이 난색을 표해 지난해부터 다시 거리로 나왔다.
극장 상영을 고집하면 영비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제의 공공성, 적합성 등을 살펴 ‘상영등급분류 면제 추천’(이하 면제 추천)을 하면 사전심의 없이 극장 상영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권영화제는 영진위의 면제 추천 자체가 사전심의에 해당한다는 태도를 고수해왔다.
영화 관계자들이 “현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데 도움이 되는 형식적인 절차 아니냐”고 했지만 영화제 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형식적인 절차가 실질적인 검열이 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영진위는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상영작으로 발표됐던 와 가 성적인 노출과 폭력의 강도가 높다며 상영을 불허했다. 김일숙씨는 “이전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규제도 강하게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심의기준은 추상적, 판정기관은 공공기관”인권영화제 주최 쪽은 여러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지난해 ‘표현의 자유 확대를 위한 영비법 개정 공동행동(준)’을 결성했다. 현재는 최문순 민주당 의원과 함께 영비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6월 임시국회 발의를 앞두고, 비영리 영화제 상영작은 등급 분류 없이 자유롭게 상영할 수 있도록 하는 ‘완전등급제’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영화를 시민심의위원회가 재심의하는 방안 등을 논의 중이다.
법무법인 한결의 박주민 변호사는 “영화 심의 기준이 추상적인데다 등급 분류 판정을 하는 영화기관이 공공기관이다 보니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우가 생긴다”며 “등급 분류를 만든 목적인 소비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로서의 기능에 방점을 두도록 개정안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법 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인권영화제는 당분간 거리 상영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세입자처럼 힘이 없어 거리로 내쫓기긴 했지만 거리에서 희망을 찾기도 했다. 지난해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치른 인권영화제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제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 푹신한 의자가 있는 극장 대신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야 했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적었다. 인권영화제가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이 만났다. 전화위복이다.
올해는 촛불집회 1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청계광장에서 영화제를 여는 만큼 의미가 깊다. 사전심의에 저항하는 투쟁은 얼마 가지 못할 거라는 싸늘한 시선 속에서도 살아남은 인권영화제가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건 짜릿한 일이다. 극장이 아닌 거리에서, 온실의 화초가 아닌 잡초처럼 자라온 인권영화제는 청계광장에서 다시 한번 기를 충전받을 생각이다.
하지만 광장 사용의 대가는 혹독하다. 영화제 기간이 축소됐고, 영화 상영에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을 사용하느라 예산은 예년보다 3배 이상 들었다. 줄어든 영화제 기간만큼 영화 상영 일정도 더 빠듯해졌다. 대신 6월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앙코르 상영회’를 연다. 영비법에 따르면 등급 판정을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게 되지만 극장주가 흔쾌히 나서줬다.
6월11일부터 성미산에서 앙코르 상영회행사 당일에 대한 걱정도 많다.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걸 겁내는 정부가 평화로운 영화제마저 오해하고 경찰력을 동원할까봐서다. 그래서 영화제 쪽은 만약의 사태도 대비하고 있다. 경찰이 영화제를 집회·시위로 간주하고 전경차로 벽을 쌓아 시민들의 접근을 차단하거나 LED 전광판에서 영화 상영을 못하게 할 경우, 동아일보 옆에서 프로젝터를 이용해 작은 규모로라도 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다. 김일숙씨는 “영화를 편하게 상영하는 게 목적이 아닌 만큼 현재의 심의 제도를 계속 거부할 생각”이라며 “영비법 개정 등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인권영화제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개막작 장호경 감독 인터뷰
<font size="3"><font color="#006699">“용산 참사, 분노의 자리엔 무력감이”</font></font>
올해 인권영화제 개막작은 다. 사건 발생 100일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는 용산 참사 문제와 집을 잃고 거리로 쫓겨난 철거민들의 투쟁을 담은 작품이다. ‘환경개선사업’이란 이름으로 땅을 둘러싼 소리 없는 전쟁이 도심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지금,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철거민들의 절규가 영상을 채운다. 연출을 맡은 장호경 감독은 “어느새 잊혀져가는 용산 참사에 대한 관심을 다시 끌어오면 좋겠다”며 인터뷰에 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은 싫다며 사진 촬영은 거부했다.
-영화 주제를 용산 참사와 철거민 투쟁에 맞춘 이유는.
=용산 참사가 일어난 뒤 경찰의 과잉 진압이나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조금씩 나와도 정작 숨진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간 이유는 잘 부각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망루에 왜 올라갔을까에 초점을 맞춰 우리 사회가 가진 개발의 환상, 재개발의 문제점 등을 다뤄보고 싶었다. 서울시 곳곳에서 이뤄지는 재개발 현장을 둘러보며 건설자본·공권력·정부의 태도가 얼마나 야만적인가도 보여주고 싶었다.
-시위 현장을 직접 촬영하면서 감정이 남달랐을 것 같다.
=재개발 현장에서 용역과 경찰이 손과 발이 되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상황을 지켜보며 분노를 느꼈다. 지금도 편집을 위해 용산 참사 영상을 반복해 보다 보면 정권이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그랬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지 않나. 이제는 그날의 분노가 가라앉은 대신 무력감이 더 크다.
-전농동, 풍동, 그리고 용산까지 동네만 바꿔 철거민들의 비극이 계속되는 것 같다.
=철거민들의 비애는 도시 산업화 이후 계속된 일이다. 철거민들이 원하는 건 자기가 살던 곳에 재정착하게 해달라는 거다. 가난한 이들이 보상비를 받아도 옮겨갈 수 있는 지역은 한정돼 있다. 개발이 투기 목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철거민들은 점차 외곽으로 떠밀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개발의 악순환을 깨트리지 못하면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
-촬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영화는 여러 영상을 모아 만들어졌다. 내가 촬영한 것, ‘칼라TV’가 찍은 것, 지역 주민들이 찍은 영상 등을 모아 60분짜리로 편집했다. 내가 빈곤사회연대 영상팀 소속이어서 철거민들과 접촉하는 일이 어렵진 않았다. 오히려 용산 참사가 벌어졌을 때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모이다 보니 언론인이 아닌 나로선 정보 접근이 어려웠다.
-영화는 어떻게 찍게 됐나.
=인권운동을 하다가 2001년에 카메라를 잡았다. 기존 미디어에서 들어주지 않는, 알리려 하지 않는 목소리들을 담는 게 내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2002년에 장애인 인권운동가 최옥란 열사 5주년 추모 영상을 만들었고, 이번 영화가 두번째 장편이다.
-용산 참사와 철거민 문제 등은 앞으로도 계속 다룰 예정인가.
=철거민 문제는 용산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이번 사건이 다른 철거 현장에서 세입자들의 권리 찾기에 영향을 줄 것이다. 아직 장례식과 보상 문제 등이 남아 있다. 끝까지 관심을 갖고 볼 생각이다. 이번 영화도 용산 참사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일으켰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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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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