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은 집을 평수와 회사까지의 거리, 가격 때문에 선택한다. 의 소년이 궁금해했던 ‘숫자를 좋아하는 어른의 세계’다. 어떤 어른은 조금 다른 ‘숫자’ 때문에 집을 찜했다. C씨, 빈집에 갔는데 전화선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찍히는 번호가 예전에 자신이 갖고 있던 휴대전화의 뒷번호와 똑같았다. 오래전에 휴대전화를 버린 그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번호였다. 운명이다 생각했다. 그대로 눌러앉았다. 잡지깨나 읽는다는 사람은 다 알 만한 그가 갑자기 세상과 연락을 두절한 뒤 찾아간 남한 정중심의 농촌마을이었다. 유원지 옆 주차장으로 문이 향해 있는 어수선한 집터였으나 그 문 모양이 고풍스러워 맘에 들었다. 배추 절이는 공장에 한 달 아르바이트 나가고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몇 달을 난다. 번 돈의 반은 맥주 사는 데 쓴다. 동네 가게에 들어오는 맥주의 거의 전부를 마실 거다. 다 버렸는데 ‘고급’ 입맛만은 못 버렸다. 텃밭에 배추와 고추를 키워 김치 담그고 고추장 담근다. 상추와 깻잎으로 가끔 얻어지는 고기도 싸먹는다. 도시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가 빈번이 내뱉는 말. “니들 참 고생이 많다.” 그는 현재 한 영화잡지를 통해 글쟁이로 복귀했다. 그가 복귀한 이유는 글 욕심 때문도, 명성에 얽매여서도 아니다. 게임머니를 벌기 위해서다. 그의 칼럼 제목은 고깃집 이름 같은 ‘돈 워리 비 해피’다.
“직장에서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흥미롭게도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여유를 부리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오직 여유를 부리거나 재미 삼아 뭔가를 할 때에만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가난뱅이’들은 많지만 자신을 가난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가끔 의식적으로 가난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 단, 단서는 있다. “가난한데요, 가난하진 않아요.” 여행 칼럼니스트 노동효(37)씨는 6년 전에 회사를 때려치웠다. 규칙적인 돈줄이 끊겼다. 지난해에는 (삼성출판사 펴냄)를 내고 돈을 좀 벌었다. 그는 국세청을 한 톨도 속여먹지 않은 ‘수입 명세서’를 ‘지출 명세서’와 함께 거리낌 없이 ‘대공개’했다. 정확한 ‘똔똔’.
“지난해 수입은 출판 인세 때문에 예년보다 좀더 많은(?) 편인데 원고료와 아르바이트 수입(제주도에서 목장일과 록클럽 바텐더를 한다)까지 합쳐 대략 1200만원 정도. 책 선인세 받아 1월 말에 네팔·히말라야·인도 여행을 갔다 왔는데 비행기 티켓 포함 두 달간 200만원 지출, 그 외 국내 여행 경비로 200만원 정도 지출, 책 사고 영화 보고 공연 보는 문화생활비로 100만원 정도 지출, 중광 스님 입적하시기까지 모셨던 봉문 스님께서 주지로 계시는 ‘내 마음의 절’ 법당에 놓을 에어컨(210만원) 시주, 나머지 500만원 정도는 생활비로 지출해서 지난해 수입 중 남은 돈은 없음.”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지지리도 가난하던 때였다. 대학 다닐 때 전구공장에 불법 취업해 700만원을 저축했다. 영국으로 갔다. 런던의 뉴크로스에서 템스강 유람선 선원으로 하루 4~5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대형 할인매장에서 생필품을 살 때면 언제나 이코노미 딱지가 붙은 최저가 자체 브랜드 상품을 샀고, 담배 살 돈이 없어 담배도 끊었다. 아침은 스니커즈 한 조각, 점심은 1파운드짜리 감자튀김으로 해결했다. 쓰던 방을 월세로 내놓고 거실에서 침낭을 펴고 지내기도 했다. 하루에 4~5시간 일하고, 4~5시간 공부하고, 4~5시간 놀았다. 그런데 아침에 눈 뜨며 ‘오늘 또 일하러 가는구나!’ 하고 한숨 쉬는 게 아니라 ‘인생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 하고 감탄했다.”
런던에서 돌아와 직장생활을 경험한 뒤 그는 다시 그 감동 어린 가난한 생활로 돌아왔다. “통장에 현금출금기로 찾을 수 있는 최소 단위인 1만원조차 없는 지경에 이를 때 옛 직장 상사나 동료로부터 전화가 와서 ‘이번에 회사를 옮겼어. 같이 일할 직원이 필요한데 해보지 않을래?’ 하고 물으면 솔깃한 적도 한두 번 있었다. 하지만 이내 다짐한다. ‘지금껏 별일 없이 잘 살아왔는데, 뭘. 다시는 출퇴근길의 지하철 환승통로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 관점에선 현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팔며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그들이니까.”
어떤 ‘가난뱅이 부류’들은 ‘가난’이란 것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언제나 딴생각에 빠져 있어서다. 가난한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가난한’이라는 조어가 어울리는 ‘예술가’들이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 마리쯤 슥 지나가도/ 무거운 매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 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질 않다/ 수만 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 빈 나를 잠근다.” -장기하,만화가 ‘앙코’(본명 최경진·26)는 지난달 생활비가 3만원이었다. 마지막으로 은행에서 돈을 뽑은 게 한 달 전이다. 이틀에 한 갑 필요한 담배는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과의 카드게임에서 딴 돈으로 충당한다. 아저씨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25개의 100원짜리가 슈퍼에 갔다 오면 담배 한 갑으로 변하는 게 신기하다. 기거하고 작업하는 사무실의 전기료 세 달치를 못 냈다. 옆 사무실과 반반씩 내는 거라 끊기진 않았지만 문 밖을 나갈 때는 옆 사무실 사람과 마주칠까봐 초조하다. 체크카드가 있는데 교통카드로만 사용한다. 신용카드를 만들러 은행에 갔지만 거절당했다.
그의 하루는 풍족하다. 그가 하는 일들이 돈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집으로 가 밥을 먹고 씻고는 사무실로 와 그림을 그리고 콘티를 짠다. 열심히 했다 싶으면 나의 휴식시간에 들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든다. 공책을 만들거나 화분에 색칠을 하거나 자전거에 그림을 그린다. 저녁에 옆 사무실 사람들이 퇴근하면 기타를 친다. 노래를 크게 부른다. 다시 책상에 앉아 새벽이 올 때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모조리 찾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삽화와 일러스트를 그려 번 돈은 모두 모아 지난해 여행을 다녀왔다. 그래서 지금 ‘가난의 절정’을 맞고 있다. 돈을 벌면 장기 여행을 가서 빈털터리로 돌아오는 게 그의 취미 중 하나다.
“독점화되어가는 부에 서로 고통받지 않으려면 그것을 쫓아낼 수밖에 없다. 탐욕스런 이기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자발적 가난’이다.” -E. F. 슈마허,금융경제연구소 홍기빈 연구위원은 몇몇 지인들과 ‘거지방닷컴’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자고 작당한 적이 있다. 우아하게 가난해지기 위해 필요한 스킬을 제공하는 사이트다. 자본주의에 속지 않으려면 연구가 필요하다.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어떻게 돈 안 쓰고 즐겁게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해봐야 하는 것이다. 불안하고 지루해진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게 쇼핑이다. “인터넷쇼핑·홈쇼핑을 보라. 시간이 없어 백화점에 갈 수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소비를 시킨다. 좀 이따가 꿈에서도 쇼핑하는 방법을 개발할 거다.”
이 ‘가난하게 우아해지기’는 자본가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이다. 자본가들이 “니네들 100만원으로 살 수 있네. 그럼 100만원만 줄게”라며 기뻐할 일이 아닌 것이다. “헌책방에 가서 3천원 주고 책을 사 일주일 동안 행복하면 어떻게 되나. 자본주의가 충격 좀 받을 거다.”
“어이, 이렇게 될 바에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멋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아? 지금 실업자 지원이나 프리터 대책 같은 걸 봐도 결국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라’ 하는 얘기밖엔 안 돼. 근데 요즘 같은 세상에 ‘제대로’ 하는 게 뭐지? 말도 안 되는 저임금에 일만 죽도록 하다가 피로 좀 풀려고 거리에 나가면 이거 사라, 저거 사라, 귀가 따갑다구… 조오타. 이렇게 된 바에야 멋대로 살아볼까! 야호! 시시한 놈들이 지껄이는 말은 듣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보자. 우리 가난뱅이가 이 세상을 한바탕 걸지게 뒤집어보자! 좋아 좋아! 정했어! 축제란 말이다. 시끌벅적 한팟이닷!” -마쓰모토 하지메,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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