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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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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할매의 집에서 나의 울림과 마주하며

지리의 연봉과 어깨를 겯고 제석봉 어린 구상나무와 가슴을 맞대는 기쁨
등록 2009-04-09 15:38 수정 2020-05-03 04:25

찾아지지 않는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어서 새겼다는 천주(天柱)라는 글씨도,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모시는 사당이었다는 성모사의 흔적도, 도쿄제국대학이 세웠다는 너와지붕 산장의 자리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더 오를 곳이 없어 하늘은 비로소 푸르고 발 아래 첩첩이 겹쳐 드는 계곡과 산자락에 기댄 세상은 아득하고 아늑하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기점을 잡아 남으로 3500여 리 끊어지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 산길 백두대간이 1정간과 13정맥으로 가지를 쳐 산하를 이루고도 남는 힘을 모아 세운 반도의 남쪽 최고봉 지리산 천왕봉은 오래도록 신화였고 신앙이었다.

제석봉 가는 길에서 올려 본 천왕봉. 옛 사람들의 기록에 나오는 키 작은 철쭉은 사람들의 발길에 사라진 지 오래다.

제석봉 가는 길에서 올려 본 천왕봉. 옛 사람들의 기록에 나오는 키 작은 철쭉은 사람들의 발길에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젠 보이지 않는 성모사 자리

산에 들기 전 중산리 천왕사를 들렀다. 사람들이 ‘천왕할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천왕할매는 지리산 자락의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오래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모셔졌던, 누구에게든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는 선도성모상을 부르는 이름이다.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조선 정조 때 지어진 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으로 전하고, 이승휴의 에서는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이기도 한 천왕할매의 집은 천왕봉이었다.

하지만 신화가 역사에 묻히고 신앙이 종교에 굴복하는 세월이다. 천왕봉 할매의 집인 성모사는 일찌감치 뜯겨 추위를 녹이는 불쏘시개가 되었고 할매마저 1970년대에 천왕봉에서 사라지는 수난을 당했다. 지금의 할매는 1987년 천왕사 주지 혜범 스님이 머리는 경남 진주 비봉산 자락의 과수원에서, 몸통은 제석봉 인근 통신골에서 찾아내 복원한 것이다.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졌던 중산리 천왕사의 선도성모상.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속설이 전한다.

천왕봉 성모사에 모셔졌던 중산리 천왕사의 선도성모상. 누구에게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속설이 전한다.

1938년 천왕봉을 올랐던 노산 이은상은 “세간의 모든 어리석은 해석과 그릇된 설법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 산상에 올라와 비로소 자기를 구제받고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게 된 것이니, 여기 이 봉정(峯頂)에 세워놓은 성모사의 유존은 그 증거”라며 할매의 격을 높였다. “조선의 여신 숭배에 대한 유일한 유존”이라는 것이 할매에 대한 노산의 생각이었다.

도쿄제국대학의 산장이 들어서도 멀쩡했던 성모사 자리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신의 자리로서 비워두었던 산꼭대기에는 천왕봉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 등산객이 표석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야야, 봐라. 여가 천왕봉이다. 내는 3시간 만에 올랐다 아이가….” 사진을 찍으려고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이는 아랑곳없이 3G폰으로 중계하는 그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다. 정복은 파괴를 전제로 한다. 그들의 빠른 하산길에 짓밟혀 쓰러진 작은 나무를 보며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고 당부하는 시가 간절하다.

배낭을 고쳐멨다. 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칠선봉~덕평봉~형제봉~삼각봉~명선봉~삼도봉~길상봉…. 천왕봉에서 서북쪽으로 지리의 연봉이 어깨를 겯고 백두산으로 가는 산길을 연다. 능선길은 희망의 세상으로서, 하늘과 사람 세상인 땅을 구별짓는 경계로서 하늘금이며 신을 영접하는 마루금이다. 그 능선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으로 들어서 제석봉으로 간다.

제석봉으로 가는 길 통천문을 지난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에서도 문을 지났었다. 하늘을 여는 개천문은 개선문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하늘로 통하는 문과 하늘을 여는 문. 천왕봉에 이르는 두 개의 문에서 옛사람들과 오늘 지리산에 오르는 이들의 다른 생각을 엿본다. 이름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증명한다. 대부분의 지리산 종주는 자동차로 성삼재에 올라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천왕봉을 정복한 개선장군들에게는 개천문보다는 개선문이 더 어울릴 터였다.

2008년에만 272만여 명이 지리산을 찾았다. 10%만 천왕봉을 올랐다 해도 산은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는 숫자다. 작은 오솔길이던 등산로는 신작로가 되고 발을 감싸는 듯 푹신한 흙길은 발목을 저리게 하는 돌길로 바뀌었다. 그러나 시인의 말처럼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다. 이름이 바뀌어도 처지가 달라져도 생명을 품고 키우는 제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장터목 빨간 우체통의 의미는
나무들의 공동묘지로 불리던 제석봉에 새 구상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리산의 상징이던 제석봉의 고사목은 도벌의 증거를 감추려는 방화의 흔적이다. NIKON D90, NIKKOR18-200, F/4.0, ISO 200

나무들의 공동묘지로 불리던 제석봉에 새 구상나무가 자라고 있다. 지리산의 상징이던 제석봉의 고사목은 도벌의 증거를 감추려는 방화의 흔적이다. NIKON D90, NIKKOR18-200, F/4.0, ISO 200

난간과 경고표지판이 사람의 발길을 막은 곳에서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리산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제석봉의 고사목은 10년 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다. 제석봉 고사목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횡행하던 지리산 도벌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낸 산불로 강제된 것이었다. 오직 한반도에만 산다는 구상나무가 하늘을 보지 못할 정도로 군락을 이뤘다는 제석봉을 나무들의 공동묘지로 만든 이들은 군인이었다. 그리고 50여 년. 산은 다시 생명을 키우고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무릎에도 이르지 못해 ‘과연 살 수 있을까’ 의심하게 하던 어린 구상나무들이 가슴 높이에 이를 정도로 제법 의젓하게 자랐다. 등산로 주변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돌로 쌓은 탑들은 아직도 산을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제석봉 아래로 내려서면 장터목이다. 남쪽의 산청군 시천 사람들과 북쪽의 함양군 마천 사람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는 장이 서던 곳이다. 봄과 가을 종자를 나누던 그 자리에 장터목대피소가 있어 이제 단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진다. 산을 오르고 산을 내려 온 사람들이 다리를 쉬는 그곳에 빨간 우체통이 들어서 있다.

“산에 오른 감상을 편지로 보내면 좋을 듯해 제안한 건데…. 좋잖아요. 산에 오르면 마음이 달라지는데 그 마음을 친구에게 전해도 좋고 스스로에게 전해도 좋을 거고요.” 산중 우체국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한 직원(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세상과 격리된 생활을 해야 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은 우체통을 만들고 우표를 팔고 또 편지들을 산 아래 우체국으로 날라야 하는 수고를 더 해야 한다. 이익이 나는 일이 아니지만 그들은 그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을 확산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은 지리산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별한 우표를 만들었다. 산 아래 시천우체국에서는 별도의 소인을 만들어줬다. 올 4월이면 그림엽서도 만들어진다고 한다.

바라보면 닮는다고 산에 사는 대피소 직원들은 산을 닮았다. 좀처럼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산처럼 그들도 말을 아낀다. 표정도 도시 사람보다 단순하다. 거기에다 어려 보인다. 하는 일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행동을 통제하는 일이다 보니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산이 사람의 발자국으로 무너지면서도 사람을 포용하듯 그들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람을 기다리고 사람을 위한다. 터무니없는 구조 요구에 허탈해하면서도 다시 구조에 나서고 무너지는 길을 보수한다. 제석봉에서 다시 씩씩하게 출발하는 구상나무의 자양분에도 그들의 땀이 담겨 있다.

장터목대피소의 하늘 아래 첫 우체통. 이곳에서 편지를 부치면 장터목 소인이 찍힌다.

장터목대피소의 하늘 아래 첫 우체통. 이곳에서 편지를 부치면 장터목 소인이 찍힌다.

연하천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 능선길은 휴식을 맞고 있었다. 봄철의 산을 보호하기 위해 5월1일까지 등산객의 출입은 통제된다. 사람의 발자국이 멈춘 길은 다시 짐승들의 차지였다. 멧돼지와 삵 그리고 알지 못하는 동물들의 배설물이 길 곳곳에 영역을 표시하고 있었다.

연하천을 떠난 백두대간 길은 촛대봉을 넘어 세석평전으로 이어진다. 높아도 비탈은 느리고 조약돌 같은 돌이 많아도 땅은 비옥하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살던 땅이어서 전하는 이야기도 많은 곳이다. 하늘과 땅, 사람과 짐승의 영역이 얽히고설키던 어느 옛날 금실 좋은 부부가 세석평전에서 살았다. 행복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어느 날 곰이 여인에게 다가와 하늘의 비밀을 일러주었다. 응양수라는 샘이 있는데 그 샘물을 먹으면 자식을 얻는다는 이야기에 여인은 샘을 찾았다. 이를 시기하던 호랑이는 산신령에게 곰이 하늘의 비밀을 사람에게 알려줬다고 고해바쳤다. 곰은 그 벌로 사람이 됐고 호랑이는 그 대가로 모든 짐승의 왕이 됐다. 여인은 샘을 더럽힌 죄로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철쭉꽃밭을 가꾸는 형벌을 받았다. 지리 8경으로 꼽히는 세석평전 철쭉꽃에 전하는 전설은 단군신화와 흡사하면서도 다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복이 아니라 형벌인 전설은 산골 살림의 궁벽함이 낳은 것이리라.

세석평전에서 되새긴 곰의 형벌

숲은 느리지만 변한다. 풀은 나무에, 키 작은 나무는 키 큰 나무에 제 땅을 내어준다. 철쭉이 피는 철이면 철쭉 아가씨를 뽑는 축제가 열리고 너른 평전에는 형형색색의 천막이 차고 넘쳤다. 그 자리에 복원의 땀방울이 흐른 지 20여 년. 구상나무들의 개체 수는 몰라보게 늘었다. 어쩌면 여인의 형벌은 이내 끝날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철쭉은 구상나무들에게 제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구상나무와 철쭉의 천이가 진행되는 세석평전.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촛대봉이고 맨 뒤가 천왕봉이다.

구상나무와 철쭉의 천이가 진행되는 세석평전.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촛대봉이고 맨 뒤가 천왕봉이다.

세석평전 곳곳에는 마치 농부가 밭을 갈아놓은 듯한 흔적이 무수하다. 멧돼지가 산오이풀의 뿌리를 먹기 위해 땅을 헤집어놓은 흔적들이다. 무너진 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뜻하지 않게 정점에 오른 멧돼지는 또 다른 고민을 남겨놓았다. 개체 수에 대한 인공적인 조절이 필요한지 여부에 대한 논쟁은 아직 진행 중이다. 사람 발길이 끊긴 지리산 능선길에서 돼지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해질 녘에 주로 먹이활동을 하는 놈은 뜻하지 않은 인기척에 신경질을 부린다. 해는 가야 할 길 노고단에 옅게 해거름을 깔더니만 이내 어둠을 불러온다.

10년 만의 지리산 길. 산은 많이 안정돼가고 있었다. 아직 산중의 봄은 일러 꽃은 봉오리조차 보이지 않지만 다시 4월이 오면 푸름은 10년 전보다 더 짙어질 것이다. 저녁 무렵 찾아든 세석대피소에서 직원들은 다가올 5월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자연은 스스로를 회복해간다고 한다. 그대로 놔두면 된다는 논리와 사람 또한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의 회복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10년 만의 지리산은 ‘결자해지’라는 옛말을 떠오르게 한다. 더 나아지는 지리산의 모습은 “사람이 망쳤으니 사람이 원상복구를 도와야 한다”는 말에 힘을 실리게 한다. 다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의 역할과 범위는 여전히 숙제일 것이다.

지리산=글· 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세석대피소에서 노고단까지의 산행 이야기는 백두대간 블로그(100mt.tistoy.com)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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