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열리기 전인 까마득한 옛날, 마고할미가 살았다. 백두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한라산에 다리가 닿을 정도로 장대한 할머니에겐 아주 귀한 반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반지를 잃었다. 그 반지를 찾느라 온 땅을 헤집어 결국은 스스로도 헤집어놓은 땅속에 묻히게 됐다는 게 강원 영월 지역에 전하는 절벽의 유래다.
10년 전처럼 가는 내내 맑은 하늘
시멘트를 만들기 위해 석회석을 캐내느라 절벽으로 변한 자병산에서 영월에서 들었던 마고할미 전설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왜일까? 저녁이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나 신령스러웠다는 자병산을 수백m 낭떠러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탐욕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더 좋은 아파트와 더 빠른 고속도로를 향한 욕심은 자병산을 사라지게 하고 우리가 기대어 살아왔고 살아갈 수많은 산들을 파헤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병산을 찾아오는 길. 하루 종일 발길이 무거웠던 이유도 10년 전 만난 그 참혹함을 다시 봐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자병산으로 가던 날은 올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고 서쪽 바닷가 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대설경보로 바뀔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러나 길을 떠나 동쪽으로 오는 내내 하늘은 맑았다. 바람조차 없어 쌓인 눈이 녹아내릴 정도로 기온이 높았다.
똑똑히 보고 제대로 전하라는 뜻인가? 10년 전 자병산을 찾던 날에도 며칠을 두고 내리던 비가 갑자기 멎었다. 다 잘려나간 자병산의 귀퉁이에 섰다. 10년 전 자병산에 처음 올랐을 때 섰던 자리보다 적어도 수십m는 더 낮아졌다. 다만 걱정하던 마루금 관통은 이뤄지지 않았다. “저기 나무가 없는 곳이 보이지요. 채광 허가를 받았지만 채광 직전 환경단체들의 요구로 채광을 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라파즈한라 최용호(49) 부장이 가리키는 사면은 다른 지역과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나무가 없었다. 그 사면 뒤로 해는 이미 기울고 쌓인 눈으로 산은 푸르게 빛나며 백두산으로 가는 마루금을 연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이라 했다. 자병산은 사라졌지만 물은 어차피 낮은 데로 흐르니 다른 능선이 마루금을 잇는다. 그 마루금을 좇아 시선을 옮긴다. 왕관처럼 솟은 저 산이 석병산이고 그다음 하얗게 빛나는 눈밭은 지난해 여름 고랭지 배추를 키워낸 안반데기 어디쯤일 것이다. 저 언덕을 넘으면 대관령이 보일 터이고, 동양 최대 목초지라는 삼양대관령목장을 지나면 오대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백두대간보전회와 더 이상 다툼은 없습니다. 상생의 관계지요.” 자병산은 백두대간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1990년대 백두대간 종주 바람이 불면서 사람들은 잘려나간 자병산을 보고는 자지러졌다. 마고할미의 손톱 자국보다도 더 참혹한 생채기 앞에서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보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척 두타산 인근 주민들과 산악인들이 참여한 백두대간보전회가 앞장섰다. 채광을 중지하라는 요구와 기업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요구가 충돌했다. 백두대간보전회는 겨우 남은 자병산 정상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였다. 시멘트 산업이 과잉 생산으로 구조조정을 겪으며 기업의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직원들이 맞섰다. 채광을 중지하면 당장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분규는 계속되고 기업과 환경단체의 골은 깊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라시멘트가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그렇게 10여 년 이미 채광 지역으로 허가를 받아둔 백두대간 마루금까지는 확대하지 않는 선으로 한라시멘트가 물러섰다. 지역단체는 기존 광구를 중심으로 지하로 채광을 더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라시멘트 ‘에코 백두대간 2+’의 탄생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들먹이며 시멘트 생산을 독려한 탓에 시멘트 공장은 자산가치가 1조원이 넘을 정도로 커진데다 지역경제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문을 닫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옥계초등학교 재학생의 절반 정도는 라파즈한라시멘트 직원 자녀들이다. 석회석 채광 중지는 곧 옥계 지역 경제의 끝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2003년인가요 제가 보전회를 찾아갔어요. 환경 훼손을 인정했지요. 그렇다고 시멘트를 만들지 않을 수도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환경에 기여할 길을 달라고 했어요.” 최용호 부장이 설명하는 ‘에코 백두대간 2+’ 운동 탄생의 배경이다. 라파즈한라는 기금을 출연하고 시민사회단체는 실행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 ‘에코 백두대간 2+’ 운동은 그동안 백두대간 훼손 지역 45ha에 나무를 심고 가꿔왔다. 지난해에는 대관령 인근 안반데기 지역에 시민단체인 ‘강릉 생명의 숲’과 함께 생태숲을 조성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나무를 심는 일과 함께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사업도 진행한다. 지금까지 35회에 걸쳐 학생 2500여 명이 현장에서 교육을 받았다. 환경부와 함께 행사도 벌이고 동부지방산림청의 숲가꾸기를 지원하는 것도 ‘에코 백두대간 2+’ 운동의 주요한 사업들이다.
채광지 현장의 복구사업도 모든 것을 투명하게 정리했다. 복구사업 자체를 외부 컨설팅을 받아 외부 기업이 진행하도록 하고, 다른 시멘트 기업에는 없는 광산복구모니터링위원회도 구성했다. 위원회에는 시민단체와 학계와 관계기관이 참가한다. 라파즈한라는 위원으로 참석하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실행 가능한 평가를 받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백두대간보전회가 현장을 감시할 수 있도록 문도 열어놓았다.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시작된 지역 및 환경단체 등과의 분규가 얼마나 많은 기회비용을 내게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1999년 이후 10년 만에 찾은 잘려나간 자병산 귀퉁이. 872m였던 산은 760여m로 내려앉았다. 앞으로 60여m 더 낮아질 것이라 했다. 귀퉁이만 남은 산 정상이 자꾸만 낮아지는 이유는 지하로 내려가면서 붕괴를 막기 위해 일정한 각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겨울의 복판이다. 능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면서 바람이 찾아온다. 강하지 않지만 견디기 어렵다. 바람은 막고 습기는 배출하는 고기능성 옷으로도 겨울바람은 견디기 어렵다. 이 추위 속에서도 발 아래 까마득한 곳에서 작업 차량들은 쉬지 않아 채광 지역에는 눈이 쌓일 틈도 없다. 저 분주함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의 의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아버지의 의무는 자신의 자리가 ‘산업역군’에서 ‘환경파괴자’로 변해도 포기할 수 없는 의무다. 자병산은 사라지기 전에도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려는 이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던 땅이다.
자연에 기대어 살던 시절 자병산은 대접받는 산이었다. 가뭄이 오래돼 천수답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제물을 싸들고 자병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렸다. 노을빛이 닿으면 산 정상은 너무나 신령스러운 빛을 발해 ‘산계8경’으로 꼽히던 아름다운 자병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빽빽했던 도장나무도 “까마귀가 자병산 고욤을 마다하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넘치던 고욤나무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숲이 사라지면서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생명의 터전도 잃었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조차 없어 지명유래집 정도에나 남아 있는 자병산 인근 골짜기의 이름은 유난히 자연환경에서 따온 이름이 많다.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기 전 자병산 골짜기에는 9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이 중 80여 가구가 이어오던 삶의 터전을 시멘트 공장에 내줬다. 지금의 시멘트 공장 자리는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워 ‘조울뜰’(照月平)으로 불리던 마을이 있던 곳이라 했다.
자연은 사람이 없어도 존재하지만 사람은 자연 없이는 살 수 없다. 채광 지역의 일부지만 복원 활동도 성과를 내고 있다. 폐석에 흙을 덮고 다지고 기다리고 몇 번의 갈아심기를 반복한 뒤에야 석회석을 캐낸 사면에서 나무는 다시 숲을 이뤘다. 한쪽에서는 나무젓가락만 한 나무들이 겨울바람을 이기며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펼치고 있었다.
라파즈한라는 이제 환경 활동을 중요한 공익 마케팅으로 인식하고 있다. 적자를 내는 해에도 지역발전기금을 출연하고 장학재단을 유지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역의 민심은 1975년 한라시멘트가 들어서던 시절처럼 큰 기대를 걸지는 않지만 함께 기대고 살아가야 할 공동체로 라파즈한라를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미 파헤쳐진 자병산 능선은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폐광 지역에 대체산업이 들어서 옥계면의 일자리를 계속해서 유지해주기를 희망한다. 일부에서는 그대로 수십 년간을 지켜보면서 자연천이에 의한 복구와 환경을 교육하는 시설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몇몇 환경단체는 법대로 원상 복구할 것을 주장한다. 이미 깎아낸 산을 다시 세우려면 또 그만한 흙과 바위를 어디선가 가져와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게다.
길어야 100년이면 석회석 바닥 드러내기왕의 채광 지역 복구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석회석 자원도 100여 년 뒤면 고갈된다는 걸 함께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병산 지역은 현 상태의 채광을 유지하면 30여 년, 우리나라 전체로는 앞으로 100여 년이면 석회석이 바닥이 난다고 한다. 100년 이후에도 계속 태어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동해·강릉=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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