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물길이 보고 싶었다. 4대강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한 이후 내내 편치 않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남한강은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한 올로 얽혔다.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낯설기 마련이다. 그러나 5천 년 넘도록 그들의 행로는 변한 적이 없다. 역류는 잠시일 뿐 물줄기는 이내 제 길을 찾아 서편으로 향했다. 그들의 의연함과 굳건함에서 희망을 본다.
세밑에 강추위가 찾아왔다. 한강물이 얼어붙고 남서해안에 폭설이 내렸다. 강원도 내륙을 지나 대관령으로 올라서자 자동차가 흔들릴 정도의 강풍이 불었다. 바람과 씨름하는 사이 10년째 숫자만 바뀌어 있는 동계올림픽 유치 기원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잔치를 여는 것이야 탓할 일이 아니겠으나 스포츠 행사 하나에 명운을 거는 모양새가 안쓰럽다. 강원도가 자랑할 물건이 어디 눈과 얼음뿐이던가.
삼척에서 두타산 길목인 댓재로 가는 길은 굽이굽이 가파른 오르막이다. 허름한 밥집에서 늦은 아침을 시켜먹는데 중년 사내 여럿이 들이닥쳤다. 부근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로 보였으나 뜻밖에도 멧돼지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의 무용담에 잠시 혼을 빼앗겼다. 사냥개 10여 마리를 풀어 멧돼지를 사지에 몰아넣고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고 했다. 사냥을 허가받은 3개월 동안 휴일도 없이 산을 누비겠다는 그들이다.
10년째 내걸린 올림픽 유치 기원 푯말맹수가 사라진 숲에서 멧돼지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다. 천적이 없는 마당에 수가 느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들은 살기 위해 농가로 내려와 밭을 헤집고 배를 채웠다. 한때 산에서 두려울 게 없는 짐승이었지만 이제 그들도 쫓기는 신세가 됐다. 문득 으르렁대는 사냥개 앞에서 잔뜩 쪼그라든 멧돼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새끼가 있고 어미가 있을 터였다. “새끼를 밴 어미 돼지는 죽이지 않는다”는 사냥꾼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싶었다.
댓재엔 칼바람이 불었다. 워낙 바람이 매서워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방한장비로 겹겹이 몸을 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냉기가 몸을 감쌌다. 등산화 끈을 조이기 위해 잠깐 장갑을 벗었다가 한참 동안 손을 비벼야 했다. 바람은 인간의 모든 구멍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눈물·콧물이 턱밑까지 흐르고 팔다리가 오그라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1시간 남짓 거칠게 밀고서야 겨우 몸을 세우고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두타산 등정의 중간 지점인 목통령에서 꼭대기를 바라보니 ‘두타’라는 지명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겨울 두타산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대로 맨살을 드러냈다. 불가에서는 ‘모든 걸림으로부터 벗어나 산천을 떠도는 스님’을 가리켜 ‘두타’라 한다. 고려시대 를 지은 이승휴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하자 이곳에 은거하며 스스로 ‘두타산 거사’라 이름지은 것도 그런 연유일 듯하다.
두타산 정상에서 또다시 칼바람과 만났다. 산 아래보다 더 차고 쓰려 왼편 청옥산을 똑바로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무에 의지해 어렵사리 중심을 잡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주변을 살피니 바닥에 눈길을 끄는 안내문구가 보였다. “뉴밀레니엄을 맞아 1천 명이 모여 1천 년을 산다는 주목 1천 그루를 강원도 지역 1천m가 넘는 봉우리에 심었다”는 기록이다. 이 주목의 이름을 ‘천년수’로 정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타산에서 청옥산으로 가는 길은 응달이다. 비탈마다 눈이 녹지 않아 빙판을 이루었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애를 썼지만 몇 차례 미끄러지고 나서야 청옥산에 닿았다. 두타와 청옥은 나란히 우뚝 솟아 주변의 산을 주눅들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7가지 보석 중 하나를 뜻한다. 따라서 두타가 수행의 산이라면 청옥은 극락의 산이다. 두타가 극락의 문이라면 청옥은 극락의 내면이다.
두타와 청옥을 끼고 동쪽으로 급하게 내려앉은 곳이 유서 깊은 무릉계곡이다. 이곳엔 이름만 들어도 시원스런 폭포와 기암절벽이 가득하다. 학소대, 하늘문, 장군바위, 병풍바위,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지명의 유래를 새겨가며 절경을 감상하다 보면 과연 신선이 머물렀을 법하다는 상상에 빠져든다. 그중 무릉정공 최윤상이 남긴 의 ‘학소대’ 편이 돋보인다.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를 띄우니, 학 떠난 지 이미 오래되어 대는 비었네. 높은 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아 슬픔을 견디나니.”
무릉계곡은 의병과 선비의 절개가 서린 땅이기도 하다. 두타산성은 임진왜란 이래 의병의 근거지였고 금란정은 구한말 유림들의 의기가 밴 곳이다. 한일합방으로 유학강론이 중단되자 선비들은 항의의 표시로 정자를 지으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제의 방해로 무산됐으니 나라 잃은 백성의 고통을 헤아리고도 남을 일이다. 지금 무릉계곡 초입에 서 있는 금란정은 해방 이후 유림들의 후손이 조상의 기백을 추앙해 세운 것이다.
무릉계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무릉반석이다. 넓은 바위 위에 수십 세대를 넘나드는 식자들이 저마다 글을 새겨놓았다. 이 중 조선 전기 4대 명필가로 알려진 봉래 양사언의 석각이 백미로 꼽힌다. 그가 무릉에 찾아와 새긴 글귀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다. 풀어보면 동양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 통한다. 반면 요즘 사람들의 암각은 기껏해야 이름 석 자를 벗어나지 못한다.
청옥산에서 연칠성령을 지나 고적대로 가는 길은 다소 험하다. 절벽에 매달린 밧줄에 의지해 외길로만 움직여야 한다. 강한 바람을 안고 오르다 보니 아찔한 순간이 연이어 찾아왔다. 고적대는 그렇게 땀을 쏟은 사람에게만 명품을 선물한다. 이곳에서 두타와 청옥을 바라봐야만 비로소 삼위일체의 균형이 살아난다. 예로부터 이 세 봉우리를 일컬어 해동삼봉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적대에서 갈미봉을 거쳐 이기령으로 가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 산중의 밤은 빨리 찾아와 금세 사위가 어두워졌다. 이기령 아래 민가에 들러 따뜻한 물을 얻어먹고 언 몸을 녹였다. 마루에 윷 조각 크기로 수북이 쌓아놓은 나뭇가지가 예사롭지 않아 주인에게 물으니 간 기능 회복에 좋다는 벌나무라 했다. 언제부터인가 숙취에 좋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사정없이 베어지고 있는 보호수종 벌나무, 주인은 그걸 팔아 올겨울 기름값에 보태겠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 동해 일출의 명소로 알려진 추암에 들렀다. 이곳은 예부터 해금강으로 불렸는데 한명회가 강원도 체찰사로 있을 때 빼어난 경관을 흠모해 능파대라 칭한 곳이기도 하다. 애국가의 배경화면으로 더 유명한 추암 촛대바위 옆에서 추암에 얽힌 전설을 들었다. “옛날 바닷가에 살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소실을 얻었다. 그날부터 여인들의 투기가 시작됐고 이를 보다 못한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살려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홀로 남은 추암 촛대바위다.”
수평선은 붉게 물들었다. 그 위로 밤을 꼬빡 새우며 오징어를 잡아올린 어선들의 불빛이 포개졌다. 해변에 늘어선 해돋이 관광객들의 표정은 잔뜩 부풀어 있었다. 같은 시각 항구로 향하는 어부들의 몸짓은 거칠고 분주했다. 추암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이방인들의 설렘과 묵호항에서 물고기를 나르는 토박이들의 고단함이 엇박자로 새벽을 깨웠다.
해가 떠오르자 추암은 평범한 바닷가로 돌아갔다. 그 무렵 묵호항에서는 밥벌이를 위한 숨막히는 경매가 시작됐다. 이제 동해바다에서 명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오징어 어획량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밥그릇이 줄어드는 판에서 인심도 점차 사나워진다. 그물을 걷어들이는 아낙들의 말씨는 서늘했고 며칠째 허탕친 도매상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이방인의 설렘과 토박이들 고단함의 묘한 교차하루 사이 대간의 바람은 달라졌다. 추위도 한풀 꺾여 모자와 장갑을 벗고도 너끈히 걸을 수 있었다. 이기령에서 원방재를 지나 백복령으로 달리는 동안 내내 추암과 묵호항의 아침 풍경이 지워지지 않았다. 백복령 넘어 채석장에서는 연이은 폭음이 들려왔다. 백두대간이 앓고 있는 또 하나의 몸살이다. 그곳에서 대간을 거슬러 내려오는 산꾼을 만났다. 그는 허기진 내게 초콜릿을 주었고 나는 목마른 그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그는 해를 넘겨 지리산까지 걷겠다고 했다.
해가 저문다. 이별이 잦고 슬픔이 깊었기에 더 서러운 겨울이다. 적지 않은 죽음을 산에서 접한 터라 하산할 때면 걱정부터 앞선다. 해가 바뀌면 또 얼마나 많은 산하의 부음을 듣게 될 것인가. 마음 편히 대간에 머물기도 어려운 참 씁쓸한 세상이다.
글·사진 육성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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