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문경 땅은 붉고도 뜨거웠다. 길가의 과수원마다 출하를 앞둔 사과들이 빼곡했다. 산자락과 담벼락엔 오밀조밀 엉겨붙은 오미자가 지천이다. 가을이면 펼쳐지는 사과와 오미자의 붉은 동거는 상당 부분 백두대간 덕이다. 기온은 높되 일교차가 큰 대간 자락에서 사과는 당도를 높이고 오미자는 신선도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사과와 오미자로 뒤덮인 시골길이 붉은 물결처럼 다가왔다 흘러간다. 자동차로 그냥 지나치는 이에게 들녘은 그저 축제의 현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고 밭으로 들어서면 이내 고단한 현실이 보인다. 풀을 뽑고 벌레를 잡고 약을 뿌리는 사람 모두가 지친 노인이다. 그들에게 사과와 오미자는 등짝을 누르는 짐이자 빚이다.
붉은 산길의 끝은 하늘재다. 고개 아래 문경 땅은 관음리요, 재 너머 충주 땅은 미륵리다. 하여 하늘재는 관음에서 미륵으로 현세에서 미래로 향하는 길목이다. 신라 제8대 왕 아달라이사금이 156년에 연 하늘재는 조선 태종 14년 문경새재가 개통될 때까지 요긴한 통로였다. 이곳을 넘으면 바로 한강에 닿기 때문이었다.
하늘재부터는 월악산 국립공원 지역으로 첫머리가 포암산이다. 산 전체가 큰 바위 덩어리인 포암산은 멀리서 보면 부처가 손을 벌리고 중생을 맞이하는 형상이다. 이 산은 오래전부터 ‘베바우산’으로 불려왔는데 한겨울 눈발이 날려 바위에 붙은 모습이 마치 베옷을 입은 것처럼 질감이 거칠다는 데서 유래했다.
하늘재 입구 쉼터에 들러 벽면 가득 대간 종주자들이 써놓은 문구들을 읽었다. 산골짜기에 농장을 일구고 주말마다 찾아와 땀을 흘리는 부부에게 이곳은 평범한 창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간꾼들이 하나둘 드나들면서 어느새 휴게소로 바뀌었다. 이제 창고지기는 산사람의 멋에 반해 요깃거리도 준비하고 술상도 차려낸다.
하늘재에서 포암산으로 붙기 무섭게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가볍게 지나칠 곳에서 자꾸만 발걸음이 멎었다. 낯익은 산이건만 내칠수록 낯설었다. 급기야 나무뿌리에 매달려 숨을 고르는 몸체를 내려다보고야 말았다. 몸은 솔직했고 마음만 조급했다. 지난 여름 잇따른 비보를 접하며 쇠하고 허해진 내 육신이 그곳에 있었다.
포암산 정상에서 대간은 방향을 틀어 월악산 주능선으로 뻗는다. 그러나 월악산 주봉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그 사이 물길이 있기에 대간은 능선 삼거리에서 동편으로 휘어져 대미산을 향한다. 이 지점부터 입산 통제를 알리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등산로와 통제 구역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경계선을 벗어나 등산로에 접어들면 그 많던 도토리와 산나물이 자취를 감춘다. 먹이가 사라진 곳에서 들짐승인들 배겨날 재주가 없다.
대미산으로 향하는 잡목지대에서 일군의 등산객을 만났다. 저마다 큰 배낭을 지고 등산로를 뒤지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도토리 채취 여행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짐승의 끼니까지 쓸어가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조금은 무안했던지 아주머니 몇 분이 숲길에 몇 주먹 뿌리고 내려갔다. 그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가는 동안 길가 어디에서도 도토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미산(大美山)은 준봉인지라 충북 제천과 경북 문경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문경 사람들은 대미산의 의미를 ‘黛眉山’이란 옛 지명에서 찾는다. 산세가 검푸른 눈썹을 닮았다는 뜻이다. 대미산 아래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물이 ‘눈물샘’으로 불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눈물샘 주변은 습한 기운이 강한데다 야생화 군락까지 있어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눈물샘의 물은 문경의 젖줄인 금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른다. 그 물길의 초입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한여름 집중호우는 계곡의 형세마저 뒤바꿔놓았다. 쓰러진 통나무가 옛길을 막아버렸고 산기슭을 무너뜨린 물줄기가 새길을 열었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쏟아진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가기까지 수백 개의 지류가 뒤섞인다. 낙동강에 닿았을 때의 물은 이미 계곡에서 출발한 물이 아닌 셈이다. 4대강을 살리겠다고 강바닥을 파헤치기에 앞서 하천 지류의 생태계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말라붙은 계곡을 걸으며 돌덩이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도 물은 모이고 고여 웅덩이가 되고 폭포가 되었다. 물이 형체를 드러내면 사람은 물을 피해 산으로 올라서야 한다. 저수지 옆 방죽을 에둘러 긴 터널을 빠져나온 물길과 다시 만났다. 저수지에 갇힌 물은 검게 퇴색하고 있었으나 보를 빠져나온 물은 이내 생기를 되찾았다. 계곡이든 강이든 물은 흘러야 한다.
산 아래는 온통 오미자 농원이다. 해가 떨어진 산촌의 어둠 속에서도 오미자의 붉은 색채는 선연했다. 이곳이 바로 사시사철 산과 달만 보인다는 생달리로 문경 땅에서도 손꼽히는 두메산골이다. 예전엔 문경 장터에서 생달리 사람을 만나면 촌놈이라 놀리기까지 했다지만 지금은 마을 곳곳에 들어선 외지인들의 펜션으로 인해 제법 휴양지 분위기를 풍긴다.
불을 밝힌 펜션 마당에서 정담을 나누는 이들에게 다가가 요기를 청했다. 숯불을 피우던 주인은 기꺼이 밥과 술을 주었다. 산꾼이라면 누구든 반갑게 집 안으로 들인다는 그였다. 연유를 물으니 자신이 독림가의 후손이라 했다. 산림을 잘 가꾸는 이들에게 나라에서 명예를 인정해주는 칭호가 독림가다. 문득 그의 집 정원을 살펴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산봉우리 위에 떠오른 달을 소나무 사이로 바라보게 만든 조경이 인상적이었다.
모여앉은 이들은 본명 대신 산중에서 서로 붙여준 이름을 불렀다. ‘송하취옹’, ‘달뫼거사’ ‘운곡선사’ ‘동곡스님’ 등 저마다 생달리의 기운을 호칭에 불어넣었다. 대간 뒤편 대미산 자락에서 궁노루 울음소리가 들리고 맞은쪽 황장산 바위 능선으로 보름달이 솟았다. 송하취옹은 가곡 을 흥얼거렸고, 달뫼거사는 우주의 신비로움을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그들의 대화는 정겹고 진지했다. 다만 그들이 꿈꾸는 미래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최근 백두대간 자락의 마을들은 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인 대신 반대급부로 금전적 혜택을 받고 있다. 이들은 더 많은 도시인들에게 대간을 보여주고 싶다며 관광자원 개발을 꿈꾼다. 펜션타운을 짓고 모노레일도 만들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사람의 이익을 앞세운 개발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 마련이다. 외부의 손에 운명이 맡겨진 생달리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이튿날 새벽 생달리 마을길을 따라 대간으로 붙었다. 일찌감치 들로 나가는 농부에게 인사를 건네니 오미자 축제부터 홍보한다. 본래 신맛·단맛·짠맛·쓴맛·매운맛 등 다섯 가지 맛을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오미자다. 하지만 문경 사람들은 저마다의 해석을 곁들여 다섯 가지 기능을 가진 신비한 약재라 부른다.
순간 이 마을 전체가 유기농 오미자를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농부의 의향을 물었다. 예상대로 유기농을 하면 열매가 잘 영글지 않아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농부는 지금 말로는 몸에 좋은 음식을 자랑하지만, 몸으로는 보기 좋은 음식을 만드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황장산은 대미산과 함께 생달리를 품고 있는 명산이다. 애초 황장산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황장목에서 나왔다. 황장목은 춘양목과 더불어 좋은 목재의 상징처럼 불렸는데, 나무 색깔이 노란색이어서 예로부터 대궐의 건축자재나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였다. 조선 숙종 때 황장산이 벌목과 개간을 금지하는 봉산으로 정해진 것도 그런 까닭이다.
밧줄 놓치고 멧돼지떼에 놀라 풀썩 ‘아차’황장산의 머리를 보려면 묏등바위에 매달린 밧줄에 몸을 싣고 칼처럼 잘려나간 절벽을 통과해야 한다. 밧줄을 믿고 기세등등하게 절벽을 오르다 갑자기 매듭이 풀리면서 암벽 아래로 떨어졌다. 설상가상 정상 부근에서는 산비탈을 타고 내달리는 잿빛 멧돼지떼를 발견하고 풀썩 주저앉았다. 땀 닦을 여유조차 놓쳐버린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삶과 죽음은 불과 한 호흡 차이일 뿐이다.
황장산을 지나면 시원한 암릉이다. 여기서부터 대간은 위세를 낮추고 벌재로 내려선다. 벌재 아래쪽 황정약수터는 한때 꽤 많은 길손들이 찾던 쉼터였으나 백두대간 월악산 구간이 통제되면서 예전의 명성을 잃었다. 약수터 옆에서 맛깔스런 음식을 팔던 포장마차도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멈춰서 있었다.
문경=글·사진 육성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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