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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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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깊이, 그립도록 들어가보라


1박2일이 하루로 족하게 된 설악, 폭설에도 아랑곳없는 ‘시속 60km 보장’…
그래 왜 아직도 백두대간인 건가
등록 2010-03-19 01:53 수정 2020-05-02 19:26

3월이다. 그럼에도 눈은 5일 동안 계속됐다고 했다. 백두대간의 서쪽에서 눈은 그저 만만할 정도였지만 한계령 마루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눈은 엄청나다라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 없어 휴게소 뒤편 설악으로 드는 길은 막혀 있었다. ‘입산통제’ 간판이 아니더라도 내려 쌓인 눈은 산으로 오를 수 없음을 말한다.

흘리마을에서 본 향로봉. 피어오르는 구름이 금강산을 향해 향공양을 올리는 향로의 연기를 닮았다. NIKON D90, NIKKOR18-200, F/2.8, ISO 200

흘리마을에서 본 향로봉. 피어오르는 구름이 금강산을 향해 향공양을 올리는 향로의 연기를 닮았다. NIKON D90, NIKKOR18-200, F/2.8, ISO 200

1200여 리, 답보다는 물음표

10년 만에 나선 백두대간 종주 취재. 허락받은 1년의 시간을 모두 사용했다. 지리산 중산리에서 시작한 1200여 리의 길을 걸으며 달리며 많은 것을 보았지만 눈 어둡고 글재주 빈약한 탓에 제대로 알린 것은 보잘것없다. 가슴보다 머리가 앞서고 나태의 늪에 주저앉기를 되풀이한 탓에 ‘왜 백두대간인가’에 대한 답보다는 물음표를 오히려 더 많이 남겼다.

한계령에서 귀때기청봉을 돌아들어 중청을 지나고 대청봉으로 오르는 길에서 칼바람을 만나고 싶었다. 산은 높으니 비록 봄이라 해도 칼바람 여전할 것이었다. 그 칼바람에 몸을 내놓으면 스스로 꾸미고 남의 시선으로 포장된 거짓된 나는 발가벗겨져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될 듯싶었다. 그러나 산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백두대간이 설악의 품을 벗어나는 마등령 어디쯤에서 설악산의 눈이 사람을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겁도 났지만 허벅지를 지나 사타구니까지 부여잡는 3월의 폭설에 길을 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들려주고 싶던 설악의 이야기는 설악산 자락에서 평생을 산 시인의 시로 대신하자.


들어가보아라/ 늘 아프던 집과 몸 잊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듯 설악 가보아라/ 아래 웃도문 지나 노루목 이르러 세상 한번 힐끔 돌아보고/ 나이 먹듯 조금씩 들어가보아라/ 인(人)내 씻고 내다버린 듯 별 쳐다보고 잠들며/ 길 잃고 산 잎사귀로 밑 닦고 짐승 내 나 / 수천 골짜기 중 한 골짜기 삐끔 열어 보이는 설악 깊이 그립도록 들어가보아라/ 석이 능이 구엽초 자라는 가야동 골 사향노루 끽끽 우는 달빛 아래/ 산죽 이파리 떠는 큰 무덤 속으로 황홀하게 들어가보아라/ 그렇게 한없이 가보아라/ 궁핍한 시대의 한 시인은 대청봉에 수박밭이 있다고 했지만/ 마음속 큰 산 무엇이 없으랴/ 사시장철 설화 피는 상상봉 깊이 들어가보아라/ 세상이 따라오지 못하는 길로 몇 날 며칠 가보아라(이상국, ‘설악 가는 길’ 전문)
한계령 정상. 양양 쪽 내리막 입구에 선 옛 오색령 표석은 오색령이란 이름을 잃은 양양군의 아쉬움이 담겨 있다.

한계령 정상. 양양 쪽 내리막 입구에 선 옛 오색령 표석은 오색령이란 이름을 잃은 양양군의 아쉬움이 담겨 있다.

처음 설악산에 들었을 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바위 봉우리와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의 소는 두려울 정도로 낯설었다. 하루 종일 걸어도 계곡은 여전히 이어져 산속에서 하룻밤을 청할 때 까만 밤하늘에 빛나던 별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두려움은 경외를 낳는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산은 사람의 땅이 아니라 신의 거처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으로 시작된 설악과의 인연은 끊이지 않아 나이만큼이나 산을 들락거렸다.

지금처럼 현대화된 대피소가 들어서기 전 대청봉의 피난처는 군인들이 사용하다 버린 벙커였다. 동해를 내려다보는 대청봉 꼭대기에 땅을 파고 들어선 벙커는 좁았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무릎조차 펴지 못해 잠을 청하지 못하던 밤. 누군가 시작한 무용담은 사람을 바꾸며 날이 새도록 이어졌다.

삼팔선으로 남북으로 나뉠 때 설악산은 북쪽의 땅이었다. 북에서 삼팔선을 넘기 전에 양양군 청년들이 공산당을 무찌른다며 설악산 대청봉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이야기도 그때 들었다. 무용담으로 밤을 지새우고 일출을 맞이하던 대청산장은 2007년 철거됐다.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산이니 당연한 조치지만 벙커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이들의 추억과 가슴 아픈 역사는 안타깝다.

산악인 10명의 목숨을 앗아가 죽음의 계곡은

설악산은 분단 이전에는 금강산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일반인의 발길이 닿지 않던 곳이다. 지금의 설악산 주등산로인 천불동 계곡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동네라는 뜻이 담겨 있을 정도로 험난한 설악산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한국 산악 문화의 발전과도 관계가 깊다. 등반 루트와 그 등반의 내용 자체를 중시하는 산악 문화인 알피니즘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의 한계를 벗어남을 추구했다. 바위 봉우리와 계곡으로 이뤄진 설악산은 이 땅에서 알피니즘을 구현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산이다. 전쟁의 상처와 가난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회복하기 시작한 1960년대에 산악인들의 발길이 설악산으로 이어졌다. 여름이면 설악산의 바위 봉우리들은 훌륭한 암벽등반 훈련장이었고, 겨울이면 얼어붙는 계곡의 폭포는 훌륭한 빙벽 훈련장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던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도 설악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18명의 대원들이 대청봉에서 희운각대피소로 이어지는 계곡에서 훈련 중에 눈사태를 만났다. 하늘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꿈꾸던 젊은이 10명을 데려갔다. 1969년 2월14일의 일이다. 당시 설악산에서 생을 마친 산악인 10명은 설악산 소공원에 묻혔다. 백두대간은 산악인 10명의 목숨을 앗아가 죽음의 계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계곡을 왼쪽으로 두고 공룡능선으로 이어진다.

남쪽 백두대간의 종착지이자 출발지인 진부령. 진부령 표석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남쪽 백두대간의 종착지이자 출발지인 진부령. 진부령 표석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능선을 잇는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공룡의 등을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공룡능선은 2006년 이전만 해도 ‘나 산에 좀 다녀’라는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할 정도로 어려운 등반 코스였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이들도 공룡능선을 겨울에 피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잡을 정도로 능선은 위험하고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한여름에 샌들을 신고도 오고 갈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등산로가 됐다. 2006년 설악산을 휩쓴 수해를 복구하면서 각종 고정시설물을 만들고 길을 넓히고 우회길을 만든 탓이다. 길을 새로 만들기 전에 공룡능선을 오르려면 적어도 1박2일의 일정은 잡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면 족하다. 지난 3월2일 마등령에서 발생한 눈사태 실종사고도 빨라진 등산로와 무관하지 않다.

등산은 온전하게 자기 안전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힘에 부치면 갈 수 없고 오를 수 없다면 오를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체력을 키우고 등반 기술을 익히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은 당연하게 제한돼야 한다. 사람의 편의를 앞세워 오르지 못할 봉우리에 사다리를 놓고, 케이블카를 놓으면서 한쪽으로는 자연을 보호한다며 산장을 철거하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명의 죽음 그리고 또 하나의 죽음

한계령 휴게소에서의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치는 듯했던 눈발이 다시 거세졌다. “올해도 풍년 들께요. 봄에 눈이 많이 내리는 해에는 농사가 잘되거든….” 석유난로에 의지해 추위를 이기던 노인이 혼잣말처럼 말을 건넸다. 눈 쌓이기 전에 고개를 서둘러 내려가라는 투였다. 차량이 한가한 휴게소 주차장 한켠에 낯선 표석이 보였다. 눈 쌓인 표석에는 ‘옛오색령’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양양군과 인제군을 나누고 잇는 한계령. 고개가 한계령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군인들에 의해 고갯길이 다시 열리고 1971년 비로소 44번 국도가 놓이면서부터다. 당시 공사를 주도한 군인들이 인제군 쪽에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 탓에 한계령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굳어졌다는 것이 양양군의 하소연이었다. 관광이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관광자원을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지자체의 고육지책이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한계령이란 이름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 설악산은 큰 산이고 사람이 기대어 살기 힘든 바위산이다. 삼국시대 동쪽 바닷가를 지배하던 신라는 설악산을 설악산으로 불렀고 인제군 쪽에서는 한계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계령 서쪽은 고갯마루에 거의 다 올라온 높이에까지 사람들이 살았다. 햇볕이 좋아 마을 이름은 재롱골로 불렀고 한자로는 자양동(紫陽洞)으로 적었다. 2006년 수해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계곡을 따라 곳곳에 집터가 보였고 산골 추위에도 벼농사를 짓기 위해 논바닥에 구들을 놓은 구들논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10년 전 취재길에서 자양동에는 “일본인들이 산을 파먹었다”는 금광과 텅스텐광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확인할 길도 없다. 2006년 물난리는 늘씬하게 자라던 자양동의 소나무는 물론이고 집채보다 더 큰 바위까지도 모두 휩쓸어가버렸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별장이었다는 장수대만이 이곳이 한때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미시령 아래서 올려다본 울산바위. 울산의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다가 주저앉았다는 설화가 전해지지만 옛 이름은 하늘의 울음이라는 뜻의 천후산이다. 바람 소리가 마치 하늘이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시령 아래서 올려다본 울산바위. 울산의 바위가 금강산으로 가다가 주저앉았다는 설화가 전해지지만 옛 이름은 하늘의 울음이라는 뜻의 천후산이다. 바람 소리가 마치 하늘이 우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을 오르지 못한 탓에 마지막 백두대간 길은 자동차로 에두른다. 한계령에서 금방이라도 폭설을 내릴 듯하던 하늘도 장수대를 지나며 다시 밝아진다. 서둘러 미시령으로 향하는 길에서 또 한 사람의 죽음을 들었다. 오직 ‘무소유’를 소유하려 애썼던 법정 스님은 마지막 가는 길에 모두를 버리기로 작정한 듯하다. 이미 “책으로 펴낸 글조차도 다시 발간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뉴스는 전했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의 부음도 백두대간 취재길에서 들었었다. 무엇인가를 찾아 전하겠다고 나선 백두대간 취재길에서…. 산에서 큰 산을 떠나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두고 떠나겠다’는 스님은 어디로 갔을까?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스님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인연은 서럽고 부끄럽기에 안도하여라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빛나는 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이상국, ‘대결’ 일부).

미시령으로 향하는 길에서 맺은 이러저러한 인연들이 있다. 평생을 설악산 자락에서 산 시인을 생각한다. 시인은 오라 했고 눈 내리면 가겠다고 답했다. 올겨울의 마지막 눈이 내리는 날 시인의 일터를 지나면서도 안부를 묻지 못했다. 시간을 탓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다만 그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조차 미안할 따름이다. 산다는 것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어야 했음에도 그리 살지 못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다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는 것은 아직은 부끄럼을 알 정도의 염치는 갖고 있다는 안도 때문이다.

미시령길 아래 낯익은 집. 약초를 팔아 먹고사는 그이는 제 키만큼 쌓인 눈에 길을 내고 있었다. 취하지 않은 시간보다 술에 취한 시간이 더 많은 그의 곁에 지금은 누가 함께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트고 지내던 시절 형수라 불리던 여인은 이제 그의 곁에 없다. 미시령 다 올라서 나라 땅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카페 간판을 내걸고 오가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던 청년도 철거하려는 공권력에 맞서다 감옥살이를 갔다. 평생 산에서 산 그는 제 손으로 지은 집을 법을 앞세워 헐어내려는 공권을 이해하지 못했다. 눈 쌓이면 길도 치우고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가 없이 업어내리던 그였다. 고성 산불에 타다 남은 재목을 날라 지은 오두막의 기둥이 뽑힐 때 그는 울지 않고 맞섰다. 지금쯤은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들의 아픔과 희망이 있던 고갯길은 눈에 막혔다. 대신 돈을 내야 지날 수 있는 터널은 폭설에도 아랑곳없다는 듯 시속 60km를 보장하며 열려 있다. 미시령에서 별은 하늘뿐만 아니라 발밑에서도 뜬다. 속초 앞바다 밤 조업에 나선 고깃배의 불빛이 별빛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그 빛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열리지 않은 미시령 고개를 오르지 못하고 진부령으로 간다. 진부령 정상. 주차장의 차들은 아예 운행을 포기한 듯 눈에 갇혀 있고 향로봉을 지키는 군인은 겹겹이 옷을 걸쳤지만 부는 바람에 애처롭다. 과거 여느 해 같으면 진부령의 겨울은 분주해야 한다. 황태덕장과 스키장은 여느 산간마을과 달리 흘리마을을 겨울에도 분주한 마을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2010년 진부령 흘리마을의 눈 내리는 겨울은 적막하다. 진부령 고개에서 마을로 드는 길목에 즐비한 펜션들조차도 아예 눈을 치우지 않았다. 올 손님이 없는 탓이다. 일제시대부터 있던 스키장은 1971년 현대식 스키장으로 개장했고 1984년 다시 확대 개발됐지만 스키장은 2006년 겨울부터 문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네 번의 겨울을 마을 사람들은 기대와 실망으로 보냈다. 백두대간 능선 위에 선 스키장 슬로프는 순백으로 아름다운데 리프트는 홀로 바람을 탄다. 비닐하우스의 눈을 쓸어내리던 마을 사람들만이 낯선 자동차가 궁금한지 시선을 떼지 못한다.

우리들 따듯했던 등이여, 아버지여

길이 열리는 곳까지 들어서겠다고 나섰지만 눈은 사타구니까지 부여잡고 길을 막는다. 앞서 백두대간을 종주한 이들이 남긴 리본에도 고드름이 맺혔고 키 작은 이정표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길에서 지나쳐온 길은 스키장을 품은 마산에 가렸고 가야 할 향로봉은 구름을 피워올리며 산 이름의 내력을 증명하려 애쓴다.

다시 도시로 돌아와야 하는 길. 작별을 고하기 위해 찾은 진부령 표석은 아예 눈을 뒤집어써 이름을 감춘다. 길을 더 가라는 뜻일까 ? 이제 길은 독자들의 몫이다. 시인의 시를 빌려 ‘왜 백두대간인가?’ 답을 대신한다.

길은 멀다/ 지게여/ 들판에는 아직 익어야 할 벼가 있는데/ 떠나간 집 담벼락에 기대어/ 너는 몸을 겪고 쉬는구나// 우리들 따듯했던 등이여// 아버지여.(이상국, ‘지게’ 전문)

인제·고성=글·사진 윤승일 한겨레디지털미디어센터 전략기획사업부문장

신백두대간기행 25. 중청~향로봉

신백두대간기행 25. 중청~향로봉

*‘신백두대간기행’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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