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에서 닭목재로 가는 시내버스는 하루 3번 있다. 겨울철 폭설이 내리면 그마저도 끊겨 걸어서 올라야 한다. 할머니들은 보따리를 한두 개씩 들고 버스에 올랐다. 시내로 나온 김에 장 보고 머리 하고 옛 친구 안부까지 묻고 돌아가는 길이다. 운전기사는 반갑게 인사하며 일일이 승객의 안부를 물었다. 버스에서 내린 노인들이 찻길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버스는 느렸으되 아무도 보채거나 푸념하지 않았다.
새끼줄을 매어 길을 열었던 눈 마을
인적이 드문 오지 산골에도 삽질을 선동하는 현수막이 어지럽다. 백두대간에 터널을 뚫고 산을 허물어 리조트를 만드는 것도 녹색개발이라고 외쳐댄다. 산의 환경적 가치가 논의 3배에 이른다는 분석은 이곳에서 저항할 힘조차 얻지 못한다. 한국이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 세계 1위이고 국가별 환경성과지수 순위에서 지난 2년간 무려 43계단이나 추락했다는 사실도 간단히 무시한다. 눈앞의 땅값이 지역의 미래를 담보로 생존을 위협하는 형국이다.
닭목재의 산세는 금계포란형이다. 하늘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꼴이다. 고개 양편 마을의 이름도 닭목골과 닭목이로 여하튼 닭목재는 닭의 목이다. 물과 빵으로 요기를 하는 사이 그곳에서 점심상을 준비하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는 아침 일찍 대관령에서 출발해 닭목재로 넘어오는 일행을 위해 밥을 짓고 찬을 차렸다. 수년째 밥하는 재미로 산꾼들을 따라다닌다고 했다.
닭목재에 올라서면 드넓은 감자밭이다. 강원도와 감자의 인연은 화전민이 일구던 구황작물 시절까지 이어진다. 고랭지에서 자란 감자는 병을 견디는 힘이 강하고 종자의 퇴화를 막을 수 있다. 강원도 씨감자가 전국적으로 널리 쓰이는 이유다. 눈밭으로 바뀐 감자밭에서 대간을 거슬러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만났다. 닭목재에서 아주머니가 차린 밥상을 받게 될 식객들이었다. 밥이 다 됐다는 소식을 전하니 얼어붙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루포기산으로 가려면 깔딱고개를 넘어야 한다. 버거운 오르막에서 눈과 씨름하며 걸었다. 햇볕이 드는 양에 따라 산속의 눈은 다른 세상처럼 갈라졌다. 양달의 눈은 등산화에 닳아 빙판이 되었으나 응달의 눈은 무릎까지 빠지는 지뢰밭으로 변했다. 지나간 이들이 남겨둔 구멍에 내 발을 밀어넣고 바닥이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이것마저 없다면 산행은 한없이 뒤처질 터였다.
고루포기산은 강릉시 대기리에서 평창군 횡계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남루한 표지판은 ‘소나무 새끼들이 포기를 지어 많이 났다’는 데서 지명의 유래를 찾는다. 예전의 고루포기마을은 눈이 많아 이웃끼리 새끼줄을 매어 길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엔 사람이 살지 않고 눈도 많이 줄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고로쇠나무가 많다는 데서 ‘고루포기’ 명칭을 따오기도 한다.
고루포기산을 지나 능경봉으로 가는 길에서 일몰이 시작됐다. 지는 해의 마지막 열기가 눈밭에 내려앉았다. 나무와 바위에 막혀 쪼개진 빛이 설원에 흩어져 연분홍빛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능경봉 너머 강릉 앞바다에도 눈과 어둠이 만나 분홍색 띠를 이루었다. 사람이 만든 길은 보이지 않았으나 흑백의 실루엣은 더욱 선명했다. 시드는 빛을 아쉬워하는 사이 바람은 차가워져 산속의 겨울을 실감케 했다.
눈 쌓인 구 영동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강릉으로 향하는 차들은 새로 뚫린 고속도로로 몰렸다. 칼바람이 부는 대관령 정상에서 불빛이라고는 김옥순씨의 매점이 유일했다. 그는 자물쇠를 채우다 말고 가스버너에 불을 붙였다. 그가 내준 뜨끈한 어묵 국물을 마시며 추위를 녹였다.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짓는 그가 이곳에 쉼터를 차린 건 2년 전이다. 산사람들 얘기가 마냥 좋아서 그냥 저질렀다고 했다. 얼마 전 강추위가 찾아온 날엔 쉼터 처마에서 노숙하던 청년을 구조했다며 그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씨의 차를 얻어 타고 횡계로 나왔다. 한때 황태 덕장이 가득했던 언덕마다 펜션이 들어섰다. 바다에서 명태가 줄어든 만큼 육지의 덕장도 사라진 것이다. 이제 함박눈으로 뒤덮인 덕장의 풍경을 횡계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대신 눈꽃 축제를 보러 몰려온 도시인들이 식당을 채우고 도로를 메웠다. 식당 아저씨도 구멍가게 아주머니도 동계올림픽 유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밤이 깊도록 횡계 시내는 들썩였고 용평스키장 쪽에서는 폭죽이 솟았다.
이튿날 새벽 대관령에 섰다. 대관령의 본래 이름은 ‘대굴령’으로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 대관령은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 소로를 낸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는데, 시대의 개척자는 길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후에 곤욕을 치렀다. 병자호란 때 주문진에 상륙한 오랑캐가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진입했는데, 전쟁 도중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는 이 사실을 전해듣고 고인의 무덤을 파헤쳐 없애라고 어명을 내렸다.
어둠이 깔린 산자락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대관령 옛길을 굽어보았다. 우뚝 솟은 봉우리는 고려 말 비운의 삶을 마감한 우왕이 머물렀던 제왕산이다. 신흥 권력자 이성계에게 쫓겨난 우왕은 이곳에 유배돼 있다가 지금의 삼척쯤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우왕이 거쳐간 터에 남아 있는 ‘제왕산성’ ‘왕고개’ ‘살해재’라는 지명에서 패자의 비극을 본다.
제왕산에서 강릉으로 내려서면 대관령 옛길이다. 오죽헌에 머물렀던 신사임당이 고개를 넘으며 지었다는 사친시의 배경도 이곳이다. 대관령 옛길에 전해 내려오는 숱한 전설 중에 ‘원울이고개’가 눈길을 끈다. 한양에서 강릉으로 부임하는 원님들은 700리 여정의 막바지인 이곳에 이르러 너무 힘든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또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강릉 사람들의 인심에 반해 울음을 터트렸다. ‘원울이’는 곧 강릉 사람을 치켜세운 덕담인 셈이다.
대관령에서 선자령으로 가는 길목에 국사성황당이 있다. 이곳의 서낭신은 신라의 선승 범일국사로 그의 어머니는 물바가지에 뜬 해를 먹고 범일을 낳았다고 한다. 지금도 강릉시 구정면엔 범일이 태어난 석천 우물이 남아 있다. 범일은 출가해 당나라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중생에게 불법을 설파한 뒤 죽어서 영동 지역을 수호하는 서낭신이 됐다. 오늘날 유네스코 유산 걸작이자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릉단오제가 국사성황당에서 열리는 까닭이 여기 있다.
선자령부터 동해 전망대까지는 대간에서 보기 드문 초원길이다. 오른편으로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왼편으로 대관령 목장을 따라간다. 몇 년 사이 달라진 점은 대간 마루금에 들어선 49기에 달하는 덴마크산 풍력발전단지다. 2MW급 풍력발전기 1대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는 숲 110만 평과 맞먹는다. 풍력에너지는 국토의 70%가 산인 나라에서 욕심낼 만한 분야임이 분명하다. 다만 발전기 1대를 짓기 위해 256㎡의 면적이 들어가고 고층 송전탑으로 경관이 바뀌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동해 전망대는 대관령 삼양목장의 꼭대기에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은 한적하게 바다와 초원을 조망할 수 있는 숨겨진 명소였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라는 명성을 타고 20분마다 셔틀버스가 다니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산꾼들이 삼양라면을 먹으며 대간에 관한 느낌을 나누던 쉼터는 사라졌다. 그곳에서 정겨운 강원도 사투리로 대관령의 사계를 그려주던 누님도 떠났다. 온기가 사라진 쉼터에 들어가 생라면을 부수어 배를 채웠다.
동해 전망대부터는 통제 구간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눈이 길을 덮었다. 무릎 위까지 다리를 파묻고 몸을 흔들어 길을 열었다. 길이 사라지면 산짐승 발자국에 몸을 맡기고 갈림길이 나오면 지도를 살폈다. 숨은 빠르게 차올랐지만 몸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다리가 뻐근하다 싶으면 그대로 눈밭에 누워 하늘과 산을 번갈아 보았다. 눈 위에 늘어선 소나무의 긴 행렬이 맘을 설레게 했다.
노인봉은 오대산 줄기가 솟구치기 시작하는 봉우리다. 산꾼들은 20년간 이곳을 지켜온 운파(雲波) 성량수 선생을 잊지 못한다. 노인봉 산장지기로 백두대간 청소부를 자처했던 그는 국립공원 대피소가 일제히 정리되던 2006년 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노인봉에 대한 그리움까지 내려놓지는 못해 수락산 밑에 ‘노인봉 주막’을 열었다.
성량수씨는 요즘 산에 오르지 못한다. 북한산에서 조난당한 등산객을 찾아 바위를 오르다 추락해 다리가 네 군데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1년 넘게 병원 치료비를 대느라 주막도 정리했다. 그를 만나러 서울 중계동으로 찾아간 날 그는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막걸릿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언젠가 꼭 노인봉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운파’라는 호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강릉·평창=글·사진 육성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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