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가 환해졌다. 고치령으로 오르기 위해 영월로 가는 길에서 아침을 맞았다. 첩첩이 산이다. 산비탈에 기댄 작은 마을의 밤을 지키던 전등은 꺼진 지 오래인데 아침 해는 먼 산을 넘지 못하고 있다. 고치령으로 가는 길은 이 일러주었다는 승지 영월정동상류가장난종(寧越正東上流 可臧亂踪)으로 가는 길과 겹쳐진다. 영월을 흐르는 강을 거슬러 상류로 찾아든다. 김삿갓 계곡이다. 계곡의 초입에서 백두대간의 반대편 큰 절인 부석사의 부석과 같은 생김새의 돌을 만난다. ‘든돌, 든바우, 뜬돌’로 불리는 바위는 부석과는 전혀 다른 전설을 전한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신통력으로 들어올린 부석은 ‘도둑의 무리’로 지칭되는 사람들을 삶터에서 쫓아냈다. 든돌은 아기장수가 난리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들어올렸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백두대간 곳곳에서 찾아지는 아기장수 설화처럼 든돌의 설화에서 아기장수도 부모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기장수 설화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민초들의 기대와 권력과 맞서는 데 대한 두려움을 모두 보여준다. 아기장수의 출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라면 아기장수의 죽음은 비겁할 수밖에 없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두려움을 상징한다.
부석의 6~7배 정도로 컸던 든돌은 김삿갓 계곡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놓인 새 길에 제 몸을 반쯤 내준 채 잊히고 있다. 새 길은 김삿갓이 묻힌 와석리 노루목을 거쳐 충청도 단양군 의풍에서 갈려 경상도 영주 땅 남대리와 마락리로 닿는다. 남대리를 지나면 마구령이고 마락리를 지나면 고치령이다.
도둑의 무리 쫓아냈다는 든돌세월을 되돌린 듯 1970년대의 새마을도로로 버티는 고치령 아랫마을 마락리로 간다. 고치령은 해방을 전후해 산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등장한 상인들인 마꾼과 선질꾼이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신식 물건들을 팔러다니는 이들은 운송수단이 말이면 마꾼으로, 지게면 선질꾼으로 불렸다. 선질꾼은 지게에 많은 짐을 실어 앉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기에 쉴 때도 서서 쉬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게는 지게를 진 채로 비탈에 기대어 쉴 수 있도록 다리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
고치령은 영주에서 충청도 단양과 강원도 영월을 잇는 빠른 길이다. 고개 아래 마을 마락리는 마꾼들과 선질꾼들이 오가며 먹고 자고 쉬는 마을로 번성했다. 마을 이름이 마락리인 것은 고개 아래 말굽이길이 험준한 바윗길이어서 종종 말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남았던 당시 흔적인 주막은 허름한 구멍가게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장사꾼들은 고개를 넘지 않는 탓이다.
승용차가 겨우 오를 만한 비좁은 고갯길인 고치령에서 가을은 이미 복판을 지나 겨울에 기울어 있었다. 나무 사이로 파고드는 아침 햇살에 낙엽송 이파리가 금빛으로 빛난다. 꽉 막힌 듯한 사방이 오히려 포근한 고갯마루에 이따금 스치듯 불어오는 바람은 차지만 신선했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소백산 편에는 단산대장군과 포도대장군이 소백지장(小白地將)을 호위하고 서 있고, 건너편 태백산 줄기가 시작되는 곳에는 태백천장(太白天將)이 양백대장과 항락(恒樂)과 함께 산령각을 지키고 있다. 소백산과 태백산을 가르는 기준인 고치령에서 소백은 땅이 되고 태백은 하늘이 된다.
산령각에서는 무속인들이 제를 올리고 있었다. 문이 열린 산령각 안에서는 호랑이를 탄 산신과 말을 탄 단종, 그리고 말고삐를 쥔 금성대군이 나란히 제상을 받고 있었다. 징 소리를 장단 삼은 보살의 사설은 이 땅의 모든 산신을 깨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백두산에서 서울의 관악산으로, 다시 대구의 팔공산으로, 또 충남의 계룡산으로…. 좀처럼 끝나지 않을 듯하다. 촛불은 심령이 깃들기라도 한 듯 사설의 가락을 타고 춤춘다. 보살의 등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막걸리를 사방에 뿌리며 두 손을 비비고 허리를 굽히던 또 다른 보살이 건네는 막걸리잔을 미소로 받아 고수레를 올리고 산으로 든다. 가야 할 길은 먼데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탈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산이다.
고치령에서 도래기재까지 산길 60여 리. 이렇다 할 이름난 봉우리를 간직하지 못한 탓에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아니면 찾는 사람이 드물고 바위를 좀처럼 보기 힘든 육산이다. 참나무와 낙엽송이 마루금까지 빼곡하고 등산로 옆으로는 철쭉과 진달래가 무성하다. 제대로 된 조망은 선달산과 옥돌봉에서나 만날 수 있다. 부지런히 걸으면 될 일이다. 이름을 갖지 못하고 숫자로만 표시된 봉우리들을 지난다.
홀로 가는 산행. 배낭에 방울을 매단 것은 멧돼지를 만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산에는 온통 신갈나무였다. 낙엽은 이미 수북해 산길까지 가릴 정도로 쌓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스치며 바스러지는 낙엽의 소리가 좋았다. 방울을 떼어냈다. 편안한 흙길에서 미끄러졌다. 양손의 스틱이 아니었다면 보기 좋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몇 차례 더 미끄러진 뒤였다. 도토리를 밟은 탓이었다. 산길 낙엽 아래에 도토리가 지천이었다. 제법 씨알이 굵은 도토리를 다람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올해 과일이 풍년이라고 했다. 산에도 과일들이 풍년이었다. 아마도 다람쥐가 귀하게 보이는 것은 곧 겨울잠에 들 다람쥐가 이미 충분한 영양을 섭취한 탓일지 모른다.
등산로를 따라 지천인 철쭉과 진달래는 벌써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잎을 떨군 여린 가지 끝에는 이미 새 눈이 달려 있었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봄을 준비하는 것은 키 큰 놈들이 드리울 그늘에서 살아내기 위한 방법이다.
미내치를 지나 마구령으로 가는 길에서 가장 높은 1097봉에 올랐다. 정상의 헬기장 덕에 비로소 하늘이 열렸다. 아침 안개가 가득하더니 하늘이 파랗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억새와 가을꽃 몇 송이와 인사를 건네고 내려서는 길에서 숲이 간직한 상처를 만났다. 소나무 마다 톱질 자국이 역력하다.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식민지 시기 자원 수탈이 어디에까지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상처들이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나무를 실어내려고 길을 열었을지도 모를 마구령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승용차로는 좀처럼 오르기 힘들었던 고갯길은 고갯마루 50여m를 남겨두고 모두 포장을 끝냈다. ‘영남의 고도’라는 남대리의 별칭은 이제 무색하다. 부석면에 비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던 남대리의 땅값도 전원 바람이 불면서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부석보다 10배 이상으로 높아졌다고 한다. 곧 터널이 뚫린다는 계획도 땅값 상승에 한몫했다며 이야기를 전해준 노인은 이제 “남대리의 깨끗한 환경도 곧 망가지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남겼다. 관광객이 모여들어 사진 찍기에 바쁜 마구령을 뒤로하고 다시 숲으로 들었다.
길은 갈곶산으로 이어진다. 부석사를 품은 봉황산은 갈곶산에서 맥을 이어간다.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부석사의 풍광은 장엄하다. 경상도를 이루는 수많은 산들과 물줄기들이 모두 부석사의 품에 안기는 듯 펼쳐진다. 양백지간은 바로 부석사에서 바라보이는 땅을 이르는 말이다. 천년왕국을 이어온 신라에 반기를 들었던 궁예는 세력을 얻은 뒤 부석사의 한 전각에 걸린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 그 초상의 주인은 궁예의 아버지인 헌안왕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는 것은 패륜을 상징하고, 신라 왕의 초상에 칼을 들이댔다는 말은 최초로 민중에 기댄 권력을 세워 미륵정토를 구현하려던 개혁군주로서 궁예를 상징한다. 오르막은 곧 내리막이고 내리막은 곧 오르막이다. 갈곶산에서 늦은목이로 내려서면 다시 선달산까지는 긴 오르막이다. 길은 숨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뒤 비로소 다시 내리막으로 안내한다. 박달령이다. 고개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내력은 변변치 못하다. 다만 고갯마루의 산령각은 태백산을 등지고 있어 매년 초파일이면 산 아래 마을 오전리 주민들이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도래기재를 앞둔 마지막 봉우리가 옥돌봉이다. 대동여지도는 백병산으로 적고 있다. 정상 아래의 하얀 바위 탓에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바위는 햇빛을 받으면 예천에서도 보인다 해서 예천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산 아래 마을은 그 빛이 비친다 해서 서벽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통행 금지된 터널 ‘금정수도’옥돌봉에서 도래기재로 내려서는 길은 봄이면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곳이다. 철쭉 군락 속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550년 된 철쭉나무가 자란다. 백두대간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난 비탈을 지키는 철쭉은 나무 둘레가 1m가 넘는다. 수령과 크기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문 경우라 한다. 철쭉 군락을 지나면 비로소 도래기재다. 안내판은 인근 마을의 이름인 도역리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지만 억지스럽다.
도래기재를 넘어서 영월 방향으로 우구치리가 있다. 금정으로 불리는 그곳은 금광이 열리면서 인구가 수천 명에 이르고 극장이 설치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당시 캐낸 금이나 은 등의 광물을 수송하기 위해 도래기재 아래에는 1925년 터널이 뚫렸다.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지만 터널은 ‘금정수도’라는 이름표를 단 채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우구치리에서 금정수도까지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고 부른 데서 고개 이름이 연유했다는 것이 금정광산의 내력을 아는 이들의 말이다. 송아지만 한 금이 묻혀 있다는 금광은 폐광된 지 오래고 금정수도 역시 통행이 금지된 지 오래다.
소백에서 태백을 잇는 양백지간 산길 60여 리. 유토피아를 갈망하던 옛사람들의 희망의 땅인 승지를 품은 산자락에서 미륵정토를 이루고자 칼을 든 궁예의 이야기는 잊혀져가고 가난한 자를 위한 아기장수의 슬픔이 담긴 ‘든돌’은 아스팔트 새 길에 묻혔다. 예언서 에는 “계룡시대가 열리면 ‘양백지간’에서 인재가 나와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고 적혔다고 한다.
영주·봉화=윤승일 기획위원 nagne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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