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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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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비원 서린 아차마을 금하굴


굳게 닫혀 있는 봉암사 산문엔 견훤에 쫓겨왔던 경순왕의 치욕이 지명으로 남아
등록 2009-08-13 16:56 수정 2020-05-03 04:25

장마전선이 물러선 주말, 힘을 잃은 약자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한 도심을 벗어나는 데 한나절이 넘게 걸렸다. 서울역 광장에서, 용산 순천향병원에서,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과 깊게 파인 주름을 보고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충청도 산골을 지나 경상도 땅으로 들어가는 동안 스치듯 지나쳐온 도시의 암울한 풍경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여행길도 고단한 법이다. 시골 노인이 알려준 지름길을 외면하고 전자지도를 따라가던 자동차는 외딴 골짜기에서 구르기를 멈추었다. 연료가 바닥난 ‘애마’를 달래고 보채어 느릿느릿 속리산 고개를 넘었다. 992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늘재에서 다시 백두대간과 만났다.

장성봉에서 바라본 문경. 대간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들이 마을을 품은 그곳엔 잊지말아야 할 역사와 신화가 살아있다. NIKON D90, NIKKOR18-200,F/2.8, ISO 200, 1/250s

장성봉에서 바라본 문경. 대간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들이 마을을 품은 그곳엔 잊지말아야 할 역사와 신화가 살아있다. NIKON D90, NIKKOR18-200,F/2.8, ISO 200, 1/250s

한여름 오지 쌍용계곡 옛 멋 잃어

늘재는 ‘눌재’라고도 불리는데 동네 사람들은 ‘늘티’라고 해야 쉽게 알아듣는다. 고개 아래에 윗늘티와 아랫늘티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등산로는 고개 앞 성황당을 바라보고 오른쪽 청화산 기슭에서 출발한다. 청화산 중턱에 위치한 정국기원단은 속리산 주능선을 북쪽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길목인지라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백두대간 중흥지, 백의민족 성지’라고 적힌 비석을 떠받치는 양편의 소나무가 일품이다.

청화산은 정상보다도 가는 길이 예쁘다. 왼편으로 의상저수지를, 오른편 남동쪽으로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원적사를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정상 바로 앞 도장산 사이 우복동에서 시작한 계곡이 최근 피서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쌍용계곡이다. 10여 년 전 이곳은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오지였으나 쌍용터널이 뚫린 뒤 특유의 멋을 잃어버렸다. 자연을 배려하지 않는 난개발 속에 늘어나는 건 오로지 펜션과 식당뿐이다.

역사적으로 청화산이 유명세를 얻은 건 산 동쪽에 위치한 우복동 덕분이기도 하다. 우복동은 지리산 청학동, 경기 가평의 판미동과 함께 유교 사회가 꿈꾸었던 전설적 이상형이다. 실례로, 평생 선비가 살 만한 땅을 찾아다닌 이중환은 에서 우복동에 대한 소견을 이렇게 적고 있다. “흙봉우리에 돌린 돌이 모두 수려하고 삼기가 적고 모양이 단정하고 평평하여 빼어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아 자못 복지다.”

청화산에서 조항산으로 가는 중간에 갓바위재가 있고 고개 앞뒤로 암릉 구간이다. 필자는 이곳에서 빗물을 머금은 바위에 네 번이나 넘어져 허리와 다리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조항산 정상에 서고 보니 그간의 수고로움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바위들은 빗줄기가 남기고 간 구름을 시시각각 새롭게 빚어내며 절경을 이루었다. 끊임없이 구름을 채웠다가 비우는 너럭바위에 앉아 조항산 아래 궁기리 마을을 응시했다. 바로 견훤이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기 전까지 세력을 키웠던 곳이다. 지금도 ‘견훤궁지’라 불리는 이 마을엔 궁궐의 위치에 따라 이름을 붙인 ‘상궁’ ‘중궁’ ‘하궁’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수많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흔적을 간직한 은티쉼터. ‘은티’는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던 고개의 이름이다.

수많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흔적을 간직한 은티쉼터. ‘은티’는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던 고개의 이름이다.

견훤은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의 옛 지명은 ‘아차’로, 견훤의 아버지 이름이 아자개라는 사실과 맥이 닿는다. 왕조의 개국신화는 대체로 영험한 동물과 궁합이 맞는데, 특이하게도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으로 전해져왔다. 그가 시대의 호걸이었음에도 전쟁의 패배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아차마을엔 견훤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금하굴이 남아 있는데 대나무 몇 그루와 초라한 돌구덩이가 전부다. 아버지의 외면으로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자식에게 버림받아 적국에 투항한 풍운아 견훤.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야박함 그 자체라 할 것이다.

구름 빚어내는 바위들의 절경

조항산 아래 고모령을 지나면 본격적인 대야산 능선이다. 대야산은 바위가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마귀할미통시바위, 손녀마귀통시바위, 굴바위, 집채바위, 고래바위 등 용모만큼이나 이름도 흥미롭다. 바위들의 축제에 취해 속도를 늦추다 집채바위와 고래바위 사이 밀재에서 멈추었다. 백발의 두 노인이 캔맥주를 나눠마시다 필자를 발견하고는 목을 축이라 권했다. 두 사람은 힘에 부쳐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대야산이 코앞인데 아쉽지 않느냐며 함께 가자 청했으나 그들은 따라나서지 않았다. 살다 보면 조금 아쉬울 때가 더 편안하다며 내게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람의 일이란 때로 예기치 못한 곳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 마련이다. 밧줄에 매달려 힘겹게 대야산에 오른 필자는 정상 문턱에서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세 명의 등산객을 만났다. 일행에서 뒤처진 그들은 벌써 5시간째 산길을 헤매다 녹초가 됐다고 했다. 누군가 길을 잘못 알려준 탓에 힘만 빼고 원위치로 돌아온 모양이다. 119에 전화를 걸어 헬리콥터를 띄워달라고 애원하는 그들 앞에서 지도를 펴고 나침반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가야 할 목표와 방향을 알려주었다.

청화산 중턱의 정국기원단. 맑은 날이면 속리산 능선이 아름답게 조망되는 곳이다.

청화산 중턱의 정국기원단. 맑은 날이면 속리산 능선이 아름답게 조망되는 곳이다.

정상 문턱에서 길 잃은 조난객들

처음엔 길만 찾아주고 내 길을 가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벌써 몸에 이상이 온 사람이 있었고 저무는 해를 보고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 일정을 취소하고 일행을 안내하기로 했다. 대야산 정상에서 피아골과 월영대를 지나 용추골로 내려오는 동안 필자를 따라나선 조난자들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처음엔 밧줄과 절벽만 보였으나 서서히 오밀조밀한 산세와 시원한 물줄기가 보인다고 했다. 산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산에 미치는 이가 나오고, 산을 좋아하는 놈이 산에서 죽는 게다.

대간을 타본 사람이라면 용추골 입구의 돌마당식당과 그곳을 15년째 운영한 심만섭(66) 선생을 기억할 것이다. 우연히 대야산을 찾았다가 산세에 반해 전 재산을 털어넣고 산장을 차린 사람. 밥값과 방값은 셈을 쳐서 받아도 찻삯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사람. 그렇게 그와 인연을 맺은 대간꾼만 수천 명에 달한다. 이성부 시인은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펴낸 시집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고통의 어떤 나이테도 드러나지 않아 나무처럼 안으로 새겨가는 사람이다.”

몇 년 사이 용추골도 펜션촌으로 변모했다. 심 선생도 지난해 식당을 팔고 떠났다고 했다. 수소문 끝에 그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더 늙기 전에 장사꾼에서 벗어나 삶을 즐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요즘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 그의 새로운 행복이 내게는 못내 아쉬웠다. 이젠 용추골에 오더라도 새벽같이 깨워 아침을 챙겨먹이고 필요하면 차까지 태워줄 사람이 없다. 고향 마을의 인심 좋은 아저씨 한 분을 잃은 듯해 섭섭했다. 심 선생이 없는 용추골에서 묵고 싶지 않아 먼 길을 돌아 나와 숙소를 잡았다.

장성봉에서 대야산 굽어볼 여유를

이튿날 새벽 경상도 사투리로 ‘벌어서 먹인다’는 뜻을 지닌 버리미기재에 섰다. 대간은 산림 보호를 위해 남북 양편 모두 통제돼 있다. 이곳에서 장성봉·악휘봉·구왕봉·희양산으로 뻗어간 산줄기는 가히 속리산에 견줄 만큼 빼어나다. 무박 산행을 하는 대개의 산꾼들이 장성봉 구간을 새벽에 지나치는데, 이렇게 내달리면 장성봉에서 대야산을 굽어볼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그 멋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땅을 치고 안타까워할 노릇이다.

희양산 자락 갈전리의 금하굴. <삼국사기> ‘견훤전’에는 “범이 산에서 내려와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고 전한다.

희양산 자락 갈전리의 금하굴. <삼국사기> ‘견훤전’에는 “범이 산에서 내려와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고 전한다.

대간은 악휘봉의 옆구리를 치고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희양산으로 향한다. 희양산은 스님들이 직접 출입을 통제하는 구간이다. 희양산 남쪽 자락에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인 봉암사가 있는 탓이다. 신라 헌강왕 5년 지증도헌국사가 창건한 9산 선문 중 하나인 봉암사는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큰 상처를 입은 한국 불교가 1947년 성철 스님의 주도로 쇄신의 깃발을 치켜든 ‘봉암사 결의’의 현장이 바로 여기다.

희양산 입구엔 목책이 둘러쳐 있고 이곳을 지나면 머지않아 길을 막는 스님을 만나게 된다. 산꾼들은 스님께 양해를 구하고 희양산으로 가는 비법을 잘 알고 있다. 스님도 대간꾼이라면 애써 발걸음을 붙잡지 않는다. 어쩌면 희양산 초입의 갖가지 산행 금지 격문들은 이곳이 청정도량인 만큼 예를 갖춰달라는 간곡한 호소인지도 모른다. 희양산 정상에서 봉암사를 내려다보며 욕설을 퍼붓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스님의 걱정에서 봉암사 산문이 1년 내내 굳게 닫힌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견훤의 흔적은 봉암사에서도 발견된다.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추대한 견훤은 이후 경순왕이 고려 쪽으로 기울자 다시 신라를 침략했다. 이때 경순왕이 피신한 곳이 봉암사였는데, 지금까지도 경순왕의 여정이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침을 먹은 곳이 아침배미, 저녁을 먹은 곳이 한배미, 난을 피해 궁으로 돌아갈 때 백성들이 환송했던 종착 지점이 배행정 마을이다.

대간은 희양산에서 시루봉까지만 북진하고 여기서부터 이화령을 바라보며 운동장 트랙을 돌 듯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길게 나갔다가 돌아온다. 도중에 우뚝 솟은 백화산과 황학산은 문경 땅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준봉이다. 이화령은 1925년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경북과 충북을 연결하는 길목이 됐다. 특히 문경 탄광으로 일하러 오는 충북 사람들에게는 요긴한 돈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화령 터널에 밀려 산꾼이나 들러 가는 옛 고개 이상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상주·문경=글·사진 육성철 저자

신백두대간 기행 ⑪ 늘재∼이화령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신백두대간 기행 ⑪ 늘재∼이화령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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