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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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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워

등록 2009-02-26 18:02 수정 2020-05-03 04:25

유학생은 외롭다. 인간은 모두 외로운데 유학생이 외로운 게 대수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꾸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혼자 외국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은 외롭다. 나처럼 외로움에 유독 둔한 사람마저 ‘외롭다’는 감정의 실체를 느끼기 시작한 건 올해 초였다. 서울에서 일을 할 때는 항상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일을 했고, 런던에서도 학기 중에는 학교에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방학의 절반은 여행으로 보냈으니, 에세이를 쓰려고 책상에 앉은 그때가 런던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지낸 시간이었다. 원래 공부라는 게 다른 어떤 일보다 외로운 일인데다 낯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도시에서 남의 언어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아무 이유 없이 손이 시릴 만큼 외롭게 느껴졌다. 그때 외로움이라는 걸 실감하고 주변 유학생들에게 그들의 외로움에 대해 물었다. 물론 대답은 대부분이 ‘그렇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외로워하고 있었다.
외로움의 첫 번째 원인은 물리적인 거리다. 인터넷으로 친한 친구나 가족과 얼굴을 보며 편하게 화상채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해도, 그 어마어마한 물리적 거리를 없앨 만큼은 아니다. 표정만으로 내 기분을 알아주는 오래된 친구와 맥주 한잔 앞에 놓고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하면서 웃는, 그런 즐거움은 없다. 제아무리 런던이 멋진 도시라고 해도 서울 광화문의 작은 골목길을 걸을 때의 그 기분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리적 거리로 인한 외로움은 때때로 무기력함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그 무기력함은 크리스마스와 새해 등 거리가 텅텅 비는 명절에 주로 강하게 나타난다.
두 번째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불완전함이다. 유학생에게는 정착을 위해 온 이민자나, 일 때문에 몇 년 동안 가족과 함께 외국에 나온 회사원과는 다른 결핍감이 있다. 그런데 유학생은 이 낯선 사회의 일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국에서의 생활을 가족과 함께하고 있지도 않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그 사회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게다가 혼자 지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회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경계 아닌 경계에 위치해 있다고 할까.
세 번째는 앞날에 대한 불안이다. 유학생 대부분은 자신의 미래가 굉장히 불투명하다고 느낀다. 공부가 취업의 전제인 우리 사회에서 ‘비싼 돈 들여 외국에 나간’ 유학은 더 나은 취업을 위한 전제가 되기 마련이고, 평생 공부할 생각으로 유학을 간 경우에는 ‘뭔가 가시적인 결과물’을 들고 돌아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이 공부를 이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취직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해 외롭고,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과연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지 확신하지 못해 외롭다.
외로움의 이유는 비슷해도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은 각자 다르다. 누구는 한국과 연결된 메신저와 스카이프를 놓지 않고, 누구는 술을 마시고, 누구는 운동을 하고, 누구는 연애를 하고, 누구는 더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래도 공통적인 방법이 한 가지 있다면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유학생들과 친구가 되는 것. 유학을 하면서 좋은 친구를 사귀는 건 공부를 잘하는 것만큼 어렵지만, 믿을 만한 친구가 있다면 유학 생활의 외로움을 이겨낼 확률이 높아지는 것만은 확실하다.
안인용 기자 한겨레 ESC팀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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