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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리” “땡큐”가 입에 밴 ‘친절한 영국씨’

등록 2009-08-06 11:40 수정 2020-05-03 04:25
슈퍼주니어 .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슈퍼주니어 . 사진 SM엔터테인먼트

내가 한국을 비운 사이 슈퍼주니어가 를 발표했다. 런던에서 이 노래를 듣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참 영국스럽군’이었다. 영국에 와서 가장 많이 한 말, 그 흔하고 간단한 ‘헬로’와 ‘하이’보다 10배쯤은 더 많이 한 말이 바로 ‘쏘리’다. 영국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 아니라, 옷깃만 스쳐도, 아니 옷깃을 스치기도 전에 ‘쏘리’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살짝이라도 몸이 닿으면 ‘쏘리’, 버스에서 내릴 때 누군가 내 앞에 있으면 우선 ‘쏘리’, 마트에서 장바구니끼리 부딪혀도 ‘쏘리’다.

런던 중심가에 나갈 일이 있었던 어느 날 하루에 몇 번이나 ‘쏘리’를 하는지 세어보았다. 내가 한 ‘쏘리’가 10번이 넘었고, 내가 들은 ‘쏘리’는 15번이 넘었다. ‘쏘리’ 다음에는 물론 ‘땡큐’, 그 다음에는 ‘땡큐’ 혹은 ‘굿바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치어스’다. 영국에서 가장 많이 듣거나 쓰는 말 중에는 ‘러블리’도 있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사든 ‘러블리’라고 약간의 탄성이 섞인 목소리로 얘기한다. 나이가 든 영국인일수록 ‘러블리’ 앞에 ‘앱솔루틀리’가 붙는다. 미안하고 고맙고 너무 좋은 일이 참 많은 영국인, 그야말로 ‘친절한 영국인씨’라고나 할까.

여기서 ‘영국인’이란 인종적 영국인뿐 아니라 영국 땅에 사는 이민자와 외국인을 모두 포함한 넓은 의미의 영국인을 말한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무뚝뚝한 이들이라도 영국에서 몇 주 동안만 ‘쏘리’와 ‘땡큐’를 반복해서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쏘리’가 튀어나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니 말이다.

말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의 대륙인들에 비해 영국인은 굉장히 친절한 편이다. 뒤에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문을 잡아주는 것은 기본이고(잡아주는 이는 웃으면서 기다려주고, 그가 잡아준 문으로 걸어들어갈 때는 ‘고맙다’고 인사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와 임산부, 장애인, 아이를 안고 있거나 유모차를 끌고 있는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도 자주 볼 수 있다(물론 양보하는 이들은 웃으면서 자리를 내어주고, 앉는 사람들은 ‘고맙다’고 인사한다).

영국인이 집착에 가깝게 지키는 ‘줄서기’를 하다 보면 영국인의 친절함을 가장 쉽고 빠르게 경험할 수 있다. 마트에서 줄을 설 때, 은행에서 줄을 설 때, 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옆에 있는 이들, 특히 아주머니나 할머니, 아저씨 군단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일이 자주 있다. 보통 줄을 잘못 서거나 살짝 몸을 스치면서 ‘쏘리’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예의 그 친절한 얼굴과 목소리로 ‘달링’과 ‘러블리’를 붙여서 다음 대화를 이어간다. 그런 식의 대화는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불평이나 자기 가족 자랑으로 끝나긴 하지만, 그래도 나처럼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갖고 사는 외국인에게 이런 식의 친절한 대화는 꽤나 편안한 경험이다.

이런 영국인의 특징을 두고 (일본인에게 주로 하는 표현처럼) ‘이중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겉으로는 웃고 예의를 다하지만, 뒤돌아서면 ‘싸’하다는 얘기다. 뭐 그런 이들도 있고 아닌 이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친절함을 애써 단점으로 뒤바꿀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인과 영국인은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달고 산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흡사하나, 공공장소의 소음이나 쓰레기에 대해선 놀랄 정도로 관대하다는 점에서는 또 놀랄 정도로 다르다.)

이들의 친절함은 얼마든지 역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영국에서 괜찮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가장 쉽게 작업하는 방법은 ‘쏘리’하거나 ‘땡큐’할 거리를 만드는 거라는 얘기다. 살짝 어깨라도 치고 ‘쏘리’로 말문을 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말을 붙일 수 있다. 만약 ‘쏘리’를 하고도 남을 상황에서 그냥 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넓은 의미의 영국인이 아닐 확률, “100프롭니다!”.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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