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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에서의 ‘고향’ 응원

등록 2009-05-20 15:38 수정 2020-05-03 04:25
바르샤에서의 ‘고향’ 응원. 사진 안인용

바르샤에서의 ‘고향’ 응원. 사진 안인용

“영국의 축구 열기는 어때? 장난 아니지? 그때 그 경기 봤어?”라고 묻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열기? 잘 모르겠는데?” 타블로이드 신문을 뒤적거리다 스포츠면을 보게 되거나 뉴스에서 얼핏 스포츠 관련 기사가 나오면 자세히 보기 전까지 그 기사가 축구 얘기인지, 럭비 얘기인지, 크리켓 얘기인지 쉽게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축구에 관심이 없다. 이런 내가 지난 5월7일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 첼시와 FC바르셀로나(바르샤)의 경기를 보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흥분을 했더랬다. 이유는 한 가지, 그날 바르셀로나에 있었기 때문이다.

5월 초, 봄학기 에세이 3개를 눈물 콧물 질질 짜며 제출하고, 나는 비행기를 탔다. 도착지는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친구네 집. 런던과는 사뭇 다른, 날씨부터 사람들 표정까지 참 맑고 밝은 바르셀로나에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던 어느 날, 바르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끝없이 눈에 띄었다. 술집마다 걸린 ‘바르샤 vs 첼시 경기 중계’라는 문구를 보고 축구 경기 응원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여기에서 축구 경기 중계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 저녁에 친구와 친구의 남자친구를 따라 인근 술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미 웬만한 술집은 출입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평소에 한적하다는 술집에 들어갔는데, 그곳 역시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맥주를 한 잔 들고 TV가 잘 보이는 계단에 앉았다. 앉자마자 들려오는 첼시의 골 소식.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직 1년도 안 됐지만 그래도 런던에 살고 있다고 런던이 연고지인 첼시에 마음이 끌리는 건지, 아니면 서울시 명예시민인 ‘희동구’(누리꾼들이 붙여준 히딩크 감독의 한국 이름)씨가 감독으로 있어서인지, 어쨌든 나는 첼시를 응원하기로 했다.

첼시가 한 골 앞서 경기를 이끌어가는 내내 흐뭇한 마음으로 이곳 술집을 가득 채운 수많은 바르셀로나 사람들을 구경했다. 축구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때 영국인은 직선적으로 벌컥 소리를 지르거나 테이블을 손으로 치며 흥분하는 반면, 이곳 사람들은 리듬감 있는 괴성과 감탄사, 그리고 화려한 제스처와 손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TV 앞에 앉은 언니는 울상이었고 술집 창문 밖에서 경기를 보던 아저씨는 계속 입술을 씹었다. 후반 막판, 드디어 바르샤의 골이 터졌고 결승 진출이 확정됐다. 사람들은 모두 벌떡 일어나 서로를 끌어앉으며 환호했다. 자동차들은 빵빵대며 바르샤의 승리를 축하했고 길거리는 카탈루냐 독립 깃발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이들로 가득했다.

바르셀로나 한복판에서 런던, 그러니까 첼시를 응원하던 나의 마음은 아팠지만, 경기가 끝나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며칠 더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다 런던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가져온 것은 축구에 대해 조금 커진 관심이다. 바르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결승전 경기는 꼭 봐야지, 라는 결심 아닌 결심도 했다. 어느 팀을 응원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열기를 생각하면 바르샤가 이겼으면 좋겠고, 박지성 선수를 생각하면 맨유가 이겼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 무엇보다 결승전까지 이 반짝 관심이 이어지기나 했으면 좋겠다, 제발!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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