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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쇼핑으로 가는 길

등록 2009-06-25 17:37 수정 2020-05-03 04:25
브릭레인. 사진 안인용

브릭레인. 사진 안인용

쇼핑에 있어 런던은 천국이자 지옥이다.

천국인 이유는 단순하다. 무언가를 사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분명히 런던에 있다. 명품부터 디자이너 브랜드나 중저가 제품, 빈티지에 앤티크 제품까지 뭐든 다 있다. 게다가 유럽의 그 어느 도시와도 다르게 런던은 쇼핑을 하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을 열렬히 환영한다. 주말이라고 가게가 문을 닫는 법도 없고, 해 떨어진다고 바로 영업을 끝내지도 않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해 음식이 좀 별로이면 어떤가, 가게와 음식점이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버젓이 영업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쇼핑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런던이 여름 세일 기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1년 중 가장 대표적인 세일 기간은 6월 말에서 7월까지, 또 크리스마스 이후인 12월 말부터 1월까지다. 지난주부터 런던 중심부에 자리잡은 수많은 가게들 유리에 큼지막하게 세일을 알리는 숫자가 나고, 2층 버스는 백화점 세일 광고를 달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세일을 알리는 TV 광고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50%에서 80%까지 세일에 들어가는 이 기간 동안 런던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이브의 사과보다 더 빨갛고 유혹적인 ‘세일’ 두 글자를 잘 피해다니지 않으면 신용카드 동산에서 영영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쇼핑복음 세일서 1장 1절의 말씀이다.

런던이 쇼핑의 천국인 진짜 이유는 대단한 세일 때문이 아니라 선택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전세계 웬만한 패스트 패션 브랜드가 모여 있는 런던의 대표적 쇼핑 지역인 옥스퍼드 거리에 가면 10만원으로 유행하는 스타일의 드레스에 가벼운 샌들 정도를 살 수 있고, 고급 쇼핑 지역인 나이트브리지나 켄싱턴에 가면 디자이너 브랜드나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무심한 듯 멋진 옷을 사고 싶다면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브릭레인(사진)이나 쇼디치 같은 곳이 딱이다. 런던에서는 쏟아지는 신상품만큼이나 오래되고 철 지난 빈티지 앤티크 제품이 괜찮은 대접을 받고, 공산품만큼이나 수제품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포토벨로 마켓이나 브릭레인 마켓 같은 런던의 수많은 마켓에서는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꾸준히 생명을 이어가는 제품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얼마 전에는 브릭레인 근처 빈티지 숍에서 ‘에스콰이아’의 오래된 가방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영국까지, 대단한 여정이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다들 다르겠지만, 나는 런던에서 쇼핑을 할 때 보통 두 가지 여정을 선호한다. 피카딜리 서커스에서 옥스퍼드 서커스를 지나 소호를 거쳐 코벤트 가든까지의 여정에서는 엇비슷한 디자인 제품 중에서 가격 대비 괜찮은 물건을 찾아내는 미션을 수행하고, 브릭레인을 지나 스피털필즈, 쇼디치로 이어지는 여정에서는 한눈에 반하는 물건을 발견하는 미션을 수행한다. 이 미션은 대부분 ‘한국에도 비슷한 거 있지 않을까’ ‘이 돈으로 차라리 여행이나 공연을 갈까’ ‘오늘 안 사면 정말 후회하겠지’ 등의 딜레마 속에서 헤매느라 생각보다 완수하기가 쉽지 않다.

쇼핑을 목적으로 하는 나들이에 지갑만큼이나 잊지 말고 챙겨가야 하는 것은 인내심이다. 이제 곧 세일의 절정에 이르는 7월, 초인적인 인내심과 절제를 통한 성공적인 쇼핑으로 천국에 갈 것인가,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인가. 이럴 때는 런던이 밉다.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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