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카드 ‘오이스터’ · 학생용 철도카드. 사진 안인용
영국의 물가에 대해 보통 ‘살인적’이라고들 하지만 북유럽에 비하면 ‘살인미수’ 정도이고, 요즘은 파운드화가 떨어져 유로를 사용하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비슷해지고 있다. 그래도 서울에 비하면 체감 물가는 꽤나 높은 편이다. 특히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몇 번은 꼭 해야 하는 것들, 그러니까 밥 먹는 것과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 이것들이 문제다. 밥이야 마트에서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요리를 해먹으면 사먹는 것보다 꽤나 저렴한 편이고, 의외로 식재료는 가끔 한국과 비슷하거나 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격대가 괜찮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로 압축된다. 교.통.비.
학교에 가거나 시내에 나갈 때 왼손에는 학생용으로 발급받은 교통카드 ‘오이스터’를, 오른손에는 학생용 철도카드를 꼭 쥐고 있다(사진). 무엇이든지 학생용은 할인 혜택을 동반한다. 그런데도 나갈 때마다 쓰는 교통비가 만만치 않다. 학생용 할인 교통카드로도 버스를 한 번 탈 때마다 2천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하고, 지하철은 한 번 타면 4천원에서 5천원은 기본이다. 30% 할인 혜택을 받는 철도카드로도 기차 두 정거장을 가는 데 3천원 넘게 낸다. 그에 비하면 4천원대의 택시 기본요금은 제법 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타자마자 쭉쭉 올라가는 미터기를 보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간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뿐인데 시내 몇 군데 돌아다니다 보면 교통비는 가뿐하게 1만원을 넘는다. 하루 종일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원 데이 트래블 카드’도 1만원이 넘으니, 어떻게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하루에 1만원은 든다는 얘기다.
문제는 대략 살인적인 교통비 덕분에 ‘내’가 변하고 있다는 거다. 한국에서의 나는 자가 운전을 매우 즐기는, ‘웬만하면 차 가지고 가거나 택시 타자’ 스타일의 ‘있어 보이는’ 고유가형 인간(움직이기 싫어하고 부지런하지 못하다는 의미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교통비 덕분에 ‘지하철 두 정거장인데 그냥 걷자’ 스타일의 발랄한 서민형으로 바뀌었다. 신발장 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한국에서 즐겨 신던 하이힐을 시내에 한번 신고 나갔다가 발이 피눈물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다음부터 거의 매일 운동화와 단화를 신다 보니, 하이힐 때문에 살짝 휜 발 안쪽 뼈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줄기차게 걸어다녀서인지 얼마 전에는 ‘발목 부근 근육이 예전보다 발달한 것 같다’는 세심한 조언도 들었다. 마트에서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올 때도, 학교에서 책 네댓 권에 노트북을 들고 나오는데 비가 왕창 쏟아져도 꿋꿋이 버스를 타고 집에 오다 보니 항상 팔과 어깨가 뻐근하다. 이러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 어깨 근육 발달로 레슬링 선수처럼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45도의 완만한 각을 이루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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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장을 보고, 무거운 짐을 들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 집에서 요리를 하는 나의 이러한 변화를 두고 혹자는 ‘사람 됐다’고도 한다. 스무 살 때 유학 왔으면 지금쯤 ‘간디’(맥락 없이 왜 간디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친절한 주석도 달아주었다. 몸이 무거운 곰이나 다름없던 나를 사람으로 만든 건 8할이 런던의 물가다. 마늘은 교통비요, 쑥은 식비일지니, 이렇게 1년이 지난 다음 한국으로 돌아가면 ‘진짜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음, 그런데 잠시 사람으로 살아보니 나는 사람보다는 곰이 체질이다. 나, 곰으로 돌아갈래.
안인용 한겨레 ESC팀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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