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 경합 주를 전부 석권하며 대선에서 압승을 거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2024년 11월17일 캠프 핵심 인사를 대동하고 유에프시(UFC)309 대회가 열린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을 찾았다. ‘백신 음모론자’로 악명 높은 로버트 케네디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 테슬라와 엑스(X·옛 트위터)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 수장 내정자 등 2기 행정부의 주역들이 동행했고, 입장 음악으로 ‘아메리칸 배드 애스’(키드 록)가 울려 퍼졌다. 이날 메인 경기에서 헤비급 타이틀을 방어한 존 존스는 트럼프에게 챔피언 벨트를 건네며 경의를 표했고, 관중은 ‘유에스에이’(USA)를 연호했다. UFC309는 데이나 화이트 회장이 주재한 ‘대선 승리 파티’나 진배없어 보였다.
데이나 화이트는 24년 넘게 종합격투기 종목 최대 단체인 UFC 회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업가이자, 트럼프의 최측근이다. 별 볼 일 없는 아마추어 복서 출신 지역 사업가로 미국 전역을 전전하던 그는 2000년 단돈 200만달러에 UFC를 인수했고, 사반세기 만에 113억달러(약 16조원) 가치를 지닌 엔터테인먼트 사업으로 키워냈다. 이것만으로도 쇼 비즈니스의 정수에 통달한 인간임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진가는 의외의 영역에서 발현됐다. 자기 사업을 거리낌 없이 현실 정치에 동원하며 트럼프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화이트는 2016년 대선 때부터 트럼프 캠프와 함께했고, 2020년과 2024년 선거에서 모두 공화당 전당대회 연사로 나섰다. 트럼프는 수시로 UFC 경기장에 얼굴을 비치며 잠재적 유권자들과 만났다.
트럼프 당선의 배경을 논하는 자리에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기 마련이지만, 화이트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치는 분석도 적지 않다. 트럼프가 세를 불릴 수 있도록 화이트가 성실하게 ‘극우의 밭’을 갈아왔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적어도 두 층위의 서사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화이트와 트럼프의 개인적 인연이다. 지금이야 세계를 호령하는 브랜드지만 1990~2000년대 초 UFC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이때의 종합격투기는 그야말로 무규칙·이종 격투기였기 때문에, 눈을 찌르거나 사타구니를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됐다. 정치인들은 이 야만성을 경멸하며 종합격투기를 합법적인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주에서 경기를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트럼프가 손을 내밀었다.
2001년 트럼프는 고사 위기에 몰린 화이트를 자신의 카지노(애틀랜틱시티의 트럼프 타지마할)로 불러 UFC 대회를 치르도록 해줬다. 차츰 스포츠의 꼴(체급 체계, 점수 제도, 라운드 제한 등)을 갖춰가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한창이던 UFC는 트럼프의 은혜를 발판 삼아 고빗길을 넘어섰고, 비로소 미래를 도모할 수 있었다. 빚을 졌으니 다음은 화이트가 트럼프를 도울 차례였다. 화이트는 트럼프가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UFC 경기장을 피난처로 제공했다. 이를테면 2024년 6월 트럼프가 포르노 배우와의 성관계 사실을 입막음하고자 회사 장부를 조작한 사건으로 무더기 유죄 평결을 받은 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도 UFC302 대회 현장이었다. 정치적 곤경과 관계없이 UFC 경기장에서 트럼프는 늘 환대받았다.
두 사람의 돈독한 개인사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둘째 층위의 서사는 ‘아웃사이더 신화’다. 변방에서 혈혈단신 기득권에 도전장을 내건 아웃사이더가 끝내 주류 사회의 정점을 제패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는 돈 많은 관종에 그쳤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된 이야기이고, 변변찮은 전직 복서 화이트가 미개한 쌈박질이라 손가락질받던 UFC를 수조원 규모의 스포츠 산업으로 키워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성공담은 주류에 대한 반감, 소외된 문화 코드(남성성)에 대한 애착 등 기본 정서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팬덤 사이 교집합도 존재할 것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백악관 고문을 지냈던 켈리앤 콘웨이는 “화이트의 기반은 트럼프의 기반이고, 트럼프의 기반은 화이트의 기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잠재력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화이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트럼프를 UFC 너머의 거대한 문화 네트워크에 연결했다. 넬크 보이스, 아딘 로스, 시오 본, 버싱 위드 더 보이스, 그리고 조 로건. 모두 팟캐스트, 유튜브, 트위치,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서 암약(?)하는 인플루언서들이다. 트럼프는 화이트의 중개로 이들의 방송과 쇼에 출연했다. 이 사람들은 극우적 언동을 일삼는 문제적 인사와 교류하기도 하지만, 방송에선 딱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들의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예능이고 코미디다. 즉, 트럼프는 ‘정치 저관여층’ 청년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창구를 찾아냈고, 이 친구들은 정치는 몰라도 온라인의 극우적 밈(meme)에는 익숙한, 트럼프의 전도유망한 표밭이었다.
UFC의 시청자층은 ‘젊은 백인 남성’에 편중돼 있다. 전술한 인플루언서들은 18~29살 청년, 주로 남성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종합격투기 경기를 보고 조 로건과 시오 본의 팟캐스트를 듣는 청년들로 직조된 커뮤니티에 기성 미디어가 설 자리는 없다. 뉴욕타임스도 할리우드도 힘을 쓰지 못한다. 화이트는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관리하는 문지기로 지난 10여 년간 트럼프에게만 자율 통행을 허가했다. 그 결과 UFC는 ‘MAGA’(마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본산지가 됐다. UFC 선수들은 다게스탄 출신 동료에게 이슬람 혐오 발언을 내뱉고,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M) 운동을 조롱하거나 여성 선수를 멸시하는 발언 따위를 공공연하게 내뱉지만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는다. 유럽의 프로축구리그나 미국프로농구(NBA)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트럼프 당선 뒤 ‘지긋지긋한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던 데이나 화이트는 얼마 전 ‘메타’ 이사회에 신임 이사로 합류했다. 마크 저커버그가 트럼프 취임식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고 페이스북에서 팩트체크 기능을 없애는 등 일련의 조처와 함께 벌어진 일이다. 화이트의 캠페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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