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은 시장을 뜻한다. 그렇지만 어쩐지 서울의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을 ‘마켓’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런던의 포토벨로 마켓을 ‘시장’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주저하게 된다. 런던 여행안내서마다 ‘꼭 가봐야 하는 마켓’이라며 밑줄 쫙 별 다섯 개 쳐놓은 수많은 마켓들은 대략 이런 분위기다. 전체적으로 빨간색이나 녹색이 눈에 띄는 화사한 분위기의 공간에 작은 가게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가게 주인은 장사꾼이라기보다 자기가 만든 혹은 자신 있는 물건을 내놓고 그 물건을 가장 아껴줄 사람을 찾는 사람처럼 보인다.
포토벨로 마켓에는 앤티크 물건이 가득하고, 캠던 마켓이나 브릭레인 마켓에는 젊은 감성이 가득한 옷이나 액세서리가 많다. 버러 마켓에는 무지개 색깔의 채소와 고기가 ‘남다른 신선함’을 뽐내며 걸려 있고, 그리니치 마켓이나 코벤트가든 마켓은 아기자기하면서 볼 게 많다. 나도 그랬지만 한국에서 온 친구들도 런던에서 꼭 가고 싶은 곳으로 이런 마켓 목록을 내놓는다. 가서도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마켓이니까.
그런데 얼마 전 런던에서 마켓이 아닌 시장을 발견했다. 얘기는 이렇다. 런던 북동부 해크니 지역 근처에 달스턴 킹스랜드 역에서 약속이 있었다. 역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다 길 건너에 사람들이 무지 많은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켓인 것 같았다. 친구가 올 때까지 시간이나 보낼까 해서 마켓으로 들어갔는데,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딸기 두 봉지에 1파운드!” 한국 시장에 가면 언제나 들을 수 있는 “티셔츠 두 장에 1만원!”과 언어만 다를 뿐 말투까지 똑같았다. 파는 물건을 봤다. 남자 허리띠, 여자 속옷, 가짜 시계, 짝퉁 명품 가방, 커다란 여행가방, 어린이 장난감과 옷 등등. 모든 물건은 저렴했고 대부분의 물건은 두 개 이상 사는 게 남는 장사였다. 중국 약을 파는 아주머니도 눈에 띄었고 트로트 느낌의 레게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CD를 파는 곳도 많았다. 냄새가 끝내주는(!) 생선가게와 채소가게, 과일가게도 많았다. 이 마켓에서 사람들을 싹 빼고 모든 영어를 한글로 바꾼 다음 한국 사람들로 채우면 영락없는 남대문시장이었다. 마켓 거리를 가득 메운 이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었다. 런던의 남동부, 그러니까 런던 관광안내 책자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오히려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 지역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친숙한 인종 분포였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 마켓은 ‘리들리로드 마켓’ 혹은 ‘달스턴 마켓’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꽤 오랫동안 캐러비안계 흑인들과 아시아인, 터키인, 그리스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으며, 방송된 지 20년이 지난 〈BBC〉 일일 드라마 의 배경이 되기도 했단다.
여기에 다녀온 다음부터 런던을 돌아다닐 때마다 이런 마켓을 찾게 된다. 그리고 런던의 중심부에도 뒷골목이나 공터에, 런던 주변부 곳곳에 이런 생활형 마켓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좋은 물건이 아니라 싼 물건을 사기 위해 시장에 오는 사람들, 잘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이 팔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 결국 사람 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을 경험하기 위해 런던에 왔지만, 오히려 같은 것을 발견할 때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안인용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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