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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괜찮아

등록 2009-03-26 11:31 수정 2020-05-03 04:25
느려도 괜찮아

느려도 괜찮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은 런던 외곽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조각가로, 전형적인 영국의 50대 중년 남자다. 두 달 전, 집 계약을 연장하려고 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음성메시지 녹음으로 바로 넘어갔다. 대략의 메시지를 남기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래도 전화가 없기에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집주인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계약 연장에 필요한 것을 적은 친절한 편지었다.

이후 서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집주인은 “가능한 한 집 유선전화로 연락하라”고 했다. 몇 주 전에 집세를 송금할 테니 은행 계좌를 알려달라고, 그의 집 전화 녹음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답은 계약서 완성본과 함께 편지로 왔다. 편지에는 “개인 정보 유출 우려가 있어 외부 사람에게는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니 수표를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 아래 친필 사인도 빼먹지 않았다. 내 영국 계좌는 학생 계좌이기 때문에 수표책이 따로 없다. 수표를 보내려면 은행에 가야 한다. 전화를 걸어 ‘번거로우니 제발 계좌번호를 알려달라. 당장 인터넷뱅킹으로 송금하겠다’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고 은행으로 향했다. 아무리 찬란한 디지털 세상이 와도 없어지지 않는 몇 가지가 영국인에게 있다는 걸 지난 6개월 동안 체득했으니까.

영국인의 생활 한가운데에는 영국 우체국인 ‘로열메일’이 있다. 영국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자기 전화번호보다 먼저 외워야 하는 것은 우편번호다. 뭘 등록하든, 어디에서 계약을 하든 자기의 개인 정보를 알려줘야 할 때 가장 먼저 우편번호를 물어본다. 로열메일이 관리하는 우편번호 시스템에 개개인의 주소가 등록돼 있는데, 그 주소는 어느 정도 신분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또 그곳으로 개개인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가 우편 전달되기 때문이다. 은행 직불카드와 비밀번호, 은행 거래 내역, 교통카드, 온갖 고지서와 설명서 등이 로열메일을 통해 개개인에게 전달된다. 편지는 영국 생활에서 꽤나 중요한 의사소통 방법인 셈이다. 고지서에는 고객센터 연락 방법으로 전자우편과 전화번호, 편지를 보낼 주소가 나란히 적혀 있다. 전화번호 아래는 “유선전화 사용시 전화비가 저렴하다”는 문구가 꼭 있다.

영국에는 이렇게 휴대전화·문자메시지·전자우편·인터넷뱅킹처럼 빠르고 편리한 것과 편지·유선전화·수표처럼 느리고 불편한 것이 공존한다. 빠른 것이 나왔다고 느린 것이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다 빨라야 할 필요는 없고, 빨리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조금 천천히 해도 상관없다. 우리 집주인처럼 돈을 조금 늦게 받아도 좋으니 안전한 수표로 받고 싶다면, 빨리 연락이 닿지 않아도 저렴한 유선전화를 사용하고 싶다면, 조금 늦게 메시지가 전달돼도 괜찮으니 편지를 쓰고 싶다면 그런 방식을 선택하면 된다. 집주인 때문에 친숙해져서인지 요즘 우체국에 부쩍 자주 간다. 지난해에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고, 보너스 카드를 등록하는 것도 고지서에 같이 온 엽서에 적어 보냈다. 조급한 마음만 덜어내고 나니 주변에 조금 느려도 괜찮은 것들이 꽤 많다. 여기서 찾아낸 것들, 한국에 돌아가서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인용 기자 한겨레 ESC팀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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