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하면 노란 택시, ‘도쿄’ 하면 지하철인 것처럼 ‘런던’ 하면 빨간색 2층 버스다. 런던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높다란 버스의 2층은 독특한 공간이다. 운전사가 없고 끊임없이 열리는 문이 없어 적당히 독립적이고 자유로운데다 버스라는 특징 때문인지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런던 시내 한복판을 달리는 버스의 2층 맨 앞자리는 지도와 사진기를 든 관광객 차지다. 노을이 지는 템스강을 달리는 버스 2층 앞자리는 연인석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2층 버스의 낭만은 여기까지. 런던 외곽이나 주거 구역을 운행하는 버스 2층에는 낭만과 조금 거리가 있는, 그래도 특별한 뭔가가 있다.
지난겨울 어느 오후, 목적지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버스를 탔다. 장시간 버스를 탈 때 늘 그러듯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2층에 올라선 순간, 후회가 몰려왔다. 2층에는 10대 남학생 5명과 여학생 3명, 도합 8명이 버스의 양쪽 좌석 창문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창문에 등을 대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결국 16개의 좌석을 차지한 셈이었다. 좌석은 비어 있는데 마땅히 앉을 곳은 없어 서성대다가 결국 맨 뒷자리로 향했다. 버스 2층 뒷자리는 1층 뒷자리보다 적어도 2배 이상 덜컹거린다. 거기까지는, ‘그래, 어디에나 이렇게 영역 표시하는 애들은 꼭 있으니까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들은 높은 데시벨의 목소리로 온갖 욕을 섞어가며 화기애매(!)한 대화를 나눴다. 맨 뒷자리에 앉아 이들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다고 벌떡 일어나 “제대로 앉아서 조용히 가지 못해!”라고 훈계라도 하기에는, 액면가에 자신이 없었다. 다른 승객들도 나와 비슷한, 꽤나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계단을 지나 2층에 올라온 낯선 목소리의 정체는 주황색 작업복을 입은, 영국에서 ‘워킹 클래스’로 일컬어지는 아저씨 6명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이들은 2층에 올라와 삐딱한 청소년들의 영역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그들의 옆자리를 채워갔다. 그리고 더 큰 목소리로 온갖 사투리를 섞어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노래도 불렀다. 청소년 무리는 마치 한 번도 입을 뗀 적이 없는 것처럼 조용히 앞을 보고 앉아 있었다. 2층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아저씨 군단에 넘어갔다. 예상치 못한 대반전은 흥미진진했다.
높다란 버스의 2층은 이렇게 때로는 영역의 주도권을 놓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몇몇 건장한 청년들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격투기장으로 변하기도 하는(손에 피가 날 때까지 싸우는 모습도 봤다) 공간이다. 퇴근 시간의 버스 2층은 무거운 눈꺼풀을 연방 들었다 놓으며 집으로 향하는 회사원들로 가득하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버스 유리창에 맺힌 수증기를 손으로 닦아내며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는 누군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볼 수 있고, 화창한 날에는 앞자리에서 햇볕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할아버지도 볼 수 있다. 버스 2층에 앉아 있으면 이곳 사람들의 진짜 삶과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든다. 엉망진창이라는 평이 대부분인, 특히 눈부신 대중교통을 자랑하는 아시아에서 온 친구들에게서 혹평을 받는 런던의 대중교통이지만, 런던의 골목길을 닮은 버스의 2층은 이렇게 특별하다.
안인용 기자 한겨레 ESC팀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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