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 코너 ‘우리 결혼했어요’로 가상결혼이란 발칙한 상상을 선보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이번엔 케이블 방송으로 넘어가 엄연한 부부를 ‘스와핑’시키는 도발을 감행했다. tvN의 는 배우자를 바꾼 두 부부가 잠자리를 뺀 나머지 일상생활을 함께한다. 두 프로그램은 모두 결혼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시청자도 출연자도 정말 원하는 건, 예쁜 공주와 잘생긴 왕자가 알콩달콩 연애하다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는 ‘환상’ 그 자체다. 하지만 텔레비전 안에서도 가상과 환상만으로 꾸며진 세상은 불가능한 법. 출연자들은 자신의 감정에서, 시청자는 내 옆 자리 애인 또는 배우자라는 현실과 방송이 보여주는 또 다른 현실 사이에서 진짜와 가짜, 실제와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프로그램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지금 당신이 “사랑한다”고 속삭인 사람은 당신의 파트너인가, 당신이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환상 속의 누구인가.
환상은 일상의 도피처다. 특히 연애와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연애를 하든 안 하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평범하거나 평화롭거나 지루한 일상에 발을 디딘 사람이라면 누구도 쉽게 포기하기 힘들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문화방송 의 ‘우리 결혼했어요’(우결)와 케이블 방송 tvN (아결)는 바로 이 환상에서 출발한다. 우결은 ‘앤디-솔비’ ‘서인영-크라운제이’ ‘알렉스-신애’ ‘황보-김현중’ 등 각기 다른 색깔의 가상부부 4쌍을 다루고 있고, 아결은 ‘홍서범-조갑경’ ‘이세창-김지연’ 부부가 서로 아내와 남편을 바꿔 살도록 했다. 두 프로그램은 모두 ‘결혼’이라는 형식을 빌려, 출연자들이 가진 연애와 결혼에 관한 환상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소망 - 환상만, 제발 환상만 보여줘알렉스와 신애는 텃밭이 딸린, 햇빛 잘 드는 아름다운 집에 살지만 춤을 추는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걱정하진 않는다. 김현중을 보고 싶었던 황보는 성수기 비행기표 걱정 없이 일본까지 날아갔다. 틈만 나면 드러눕던 정형돈은 가장 현실에 가까운 남편의 모습이었지만, 그 때문에 안티팬만 잔뜩 늘어난 채 중도 하차했다. 반대로 알렉스의 달콤한 이벤트들은 비현실적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시청자들이 우결과 아결을 보는 건 ‘남들은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하면 어떻게 살지?’라는 원초적인 궁금증 때문이다. 하지만 두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철저한 판타지다. 이미 현실에서 쉽게 보기 힘든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들이 잘 만들어진 각본에 맞춰 가상 현실을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작가 양지윤(34·가명·비혼여성)씨는 “내가 우결에서 보고 싶은 건, 결혼이 연애의 연장이 될 거라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양씨는 “내 결혼을 상상할 때, 남편은 늘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아내는 그것 때문에 화내고 문 안 열어주는 ‘옆집 그녀’처럼 살고 싶진 않다. 그걸 텔레비전에서 보고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이런 판타지는 거꾸로 연애와 결혼의 환상을 심어주거나, 대리만족을 주기도 한다. 가장 최근 남자친구와 헤어진 게 3년 전이라는 윤정민(31·가명·비혼여성)씨는 “설레는 마음이 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고, 솔직히 이젠 그런 마음이 생길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우결을 볼 땐 ‘나도 앤디처럼 자상한 남자랑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고 말했다. 비혼남성 홍진욱(36·가명)씨도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나조차 ‘결혼 판타지’를 자극받는 순간이 있다. 우결에서 빨래를 누가 하고, 설거지를 누가 하느냐로 다투는 일상이 아니라 결혼해서 저렇게 예쁘게 사랑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개팅을 주선하거나 주선받은 경험을 떠올려보자. “이상형이 어떻게 돼? 키 커야 해? 직업은 어떤 게 좋겠어? 학교는?” 따위의 질문이 가장 먼저 따라온다. 결혼정보회사 가 1996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이상적인 배우자상과 결혼의식’ 설문조사 항목엔 맞벌이를 원하는지, 배우자의 직업과 연봉은 어때야 하는지, 결혼 적령기는 언제라고 생각하는지 등 결혼이 성립되기 위한 기초적이고 현실적인 질문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누구도 “당신은 어떤 사랑을 꿈꾸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들의 질문은 매우 유용한 정보이긴 하지만, 어쩐지 그것만으론 허전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결은 연인 관계의 전형성을 띤 네 커플, 즉 유형별 판타지를 등장시켰다. 특히 이 관계는 알게 모르게 여성 중심으로 짜여진 판타지에 가깝다. “당신은 어느 유형에 속하느냐”는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댈 순 있지만, 곧 어떤 관계가 내가 꿈꾸는 연애 혹은 결혼과 비슷한 커플인지는 찾아낼 수 있다. 윤정민씨는 “남자친구가 물론 키도 컸으면 좋겠고, 번듯한 직업도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연애라는 건 너랑 나랑 잘 맞춰갈 여지가 있는지를 찾아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냐. 내 이상형이 오래 전 헤어진 첫사랑인데, 헤어졌기 때문에 그 이상형한테 품은 환상이 더욱 커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앤디와 솔비의 관계를 보면서 그 때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홍진욱씨는 “서인영과 크라운제이 커플을 가장 재밌게 봤는데, 그렇게 통통 튀는 연애가 바로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관계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결혼 3년차인 정보기술(IT) 개발자 강동현(31)씨는 “처음엔 스타들의 재밌는 캐릭터에 이끌려 보게 됐는데, 갈수록 출연자들이 파트너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과 그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캐릭터를 보는 재미에 익숙해진 것 같다”며 “이들의 관계가 안정기에 이르러서인지, 요즘엔 색다르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학적으로 열정적인 사랑의 지속기간이 1~3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남녀관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는 건 경험으로 안다. 연애 감정은 쉽게 시들어버리기 마련이라 더더욱 연애의 환상에 사로잡히는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밀고 당기면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은 생략됐지만, 여섯 달 넘게 우결 커플의 관계가 변해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건, 조언을 해줄 수 없다는 차이를 빼고 나면 마치 내 자신이나 친구의 연애 과정을 지켜보는 일과 비슷하다. 양지윤씨는 “내가 꿈꾸는 결혼은 서로의 삶과 인격을 존중하면서 친구로, 울타리로 살아가는 것”이라며 “그건 불꽃 튀는 연애 뒤에 찾아오는 권태로움을 얼마나 현명하게 신뢰감으로 바꿔나가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우결 커플은 애초부터 가상이었던 탓에 그런 슬기로움까지 알려주진 않는다”고 말했다.
아결은 ‘다른 사람과 살아보고 싶다’는, 누구나 갖고 있지만 감춰둔 환상을 노골적으로 실현해보였다. 김지수(32·가명)씨는 “남편이랑 연애만 8년 했고, 결혼한 지는 4년 됐다. 내 삶에서 이 사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거다. 그렇지만 남편 말곤 만나본 남자가 없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랑 살아보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은 가끔 한다. 아결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아결이 보여줄 수 있는 판타지는 ‘바꿨다’는 것 말고는 거의 없다. 스와핑이라는 설정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낮은데다, 실제 아이들까지 등장하는 탓에 조금 더 리얼리티에 가깝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세창과 조갑경이 육아 방식을 놓고 다투는 걸 보면서,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과 내가 아이 분유 타는 방법으로 신경전을 벌인 일이 생각났다. 난 아이가 빨리 울음을 그치도록 얼른 분유를 타다 주면 좋겠는데, 남편은 ‘아이가 먹을 음식이니 청결이 더 중요하다’며 손부터 씻더라. 아이 기저귀값 생각하면 외식하러 가서도 비싼 음식은 여간해선 먹어지지가 않고, 오늘 남편 저녁상엔 뭘 차려줘야 할까, 이번 주말엔 시댁을 가야 하나, 그런 시시콜콜한 고민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다른 삶은 어떨까’ 상상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런데 김씨는 “그래도 그건 가끔의 상상일 뿐이다. 결혼이라는 틀 안에선 누구나 다 똑같이 겪는 일상인데, 누구랑 살아도 똑같은 결론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결혼한 지 3년 된 이주은(29·가명)씨는 “가사노동이나 육아 문제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연애의 연장’으로만 생각하고 결혼했고, 그래서 결혼 직후에 몹시 힘들었다”며 “아이가 생기면 결혼생활이 아니라 육아생활이라는 생각엔 변함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 아직 내 결혼생활 자체에서 환상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아결을 보면서 집중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덧붙였다.
현실이 팍팍할수록 로맨스의 갈망은 더욱 강해지는 걸까. 이들 프로그램은 왜 하필 지금 결혼이란 소재를 선택했을까. 강명석 〈매거진t〉 수석기자는 “그래야 요즘 연애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튜디오나 섬에 모인 화려한 연예인들이 “이래도 니가 나를 안 사랑할 거야?”식으로 자신의 매력을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뿜어내면서 이성의 ‘간택’을 기다리거나, 감질나는 연애 직전의 탐색전으로는 연애의 판타지를 채워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연인이 일상 공간에서 데이트를 하는 모습만으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연애 과정을 긴장감 있게 보여줄 수 없다. 결혼이란 예쁜 연애를 보여주기 위해 둘을 묶어둘 수 있는 적절한 장치”라고 말했다. 한 대중문화평론가는 우결·아결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원인을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쉴 틈 없이 내몰리는 20~30대의 현실”에서 찾았다. 그는 “연애를 하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직장을 잡고서도 이리저리 치이기 일쑤다. 간신히 결혼해도 장벽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연애에도 결혼에도 꿈을 꿀 시간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성한 결혼’을 ‘신선한 파격’으로 받아들이고, 판타지를 판타지 자체로 여길 정도로 연애 프로그램을 소비하는 시청자의 인식이 변한 점도 중요한 요소다. 우결의 김구산 책임PD는 “가상 결혼은 일종의 역할 놀이인데, 출연자도 시청자도 이젠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준비가 된 것 같다”며 “2005년에 이런 프로그램을 해볼까 내부에서 논의하다, 결혼이란 설정은 너무 충격이 강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때 이 프로그램을 시도했다면 실패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솔비 할머니의 친구처럼 “왜 손녀딸 결혼하는 데 안 불렀냐”고 따질 시청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다. 아결의 이덕재 편성팀장도 “사이코 드라마의 역할 바꾸기를 통해 마음의 병을 치유하듯, 아결도 역할 바꾸기로 자기 가족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임영웅 소속사 “고심 끝에 예정대로 콘서트 진행…취소 때 전액 환불”
[단독] “무안공항 로컬라이저 땅 밑까지 콘크리트…의아했다”
헌법재판소 ‘8인 체제’로…윤석열 탄핵심판 속도 붙는다
헌정사 첫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윤석열 체포 시간만 남았다
‘테라·루나’ 권도형, 결국 미국으로 추방…FBI에 신병 인도
몬테네그로, ‘테라·루나 사태 주범’ 권도형 미국으로 인도
민주 “평양 무인기 침투, 국가안보실이 드론작전사에 직접 지시”
박종준 경호처장, 윤석열 체포영장 막나…내란사태 연루 의혹도
국힘 ‘내란 국조’ 반대표 우르르…국조 참여 의원도 기권·반대
여야 눈치 본 최상목, 극한 대치상황서 결국 ‘줄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