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냉면과 파리 만국박람회의 관계는?

등록 2008-07-29 00:00 수정 2020-05-03 04:25

일제 자본의 손길 아래 근대의 맛으로 포장되어 월남한 실향민들에 의해 전국에 보급되다

▣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냉면교 신자들이여, 냉면의 과거를 아느뇨

‘이제 냉면은 공기, 물과도 같다!’
곳곳의 ‘냉면교’ 신자들이 아우성친다. 유난히 심란한 올여름, 쇠심줄 면발과 등골 서늘한 육수, 매캐한 양념으로 무장한 냉면의 기세는 더욱 등등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갈수록 ‘광팬’을 늘려가는 냉면의 힘은 역사에서 나온다. 지금 즐겨먹는 냉면은 전통음식이라기보다 지난 세기가 빚어낸 근대 음식에 더 가깝다. 식민지 시대 일본 맛문화와 분단·전쟁으로 남한에서 뒤섞인 8도의 맛이 지금 냉면의 원형질을 이룬다. 메밀과 전분 뒤섞은 면발을 틀에서 쭉쭉빵빵 뽑아내어 육수에 빠뜨려 먹는 이 여름별미는 가시밭길 한국 근대사를 머금고 있다. 맛 속에는 세태가 있고, 역사가 묻어 있다. 변덕스런 취향, 혼돈스런 세태에 절묘하게 발맞추면서, 이제 외식산업의 강자로 자리잡은 냉면의 과거를 캤다.

냉면에 대한 한국인들의 일반적 상식은 평안·함경도 지방에서 예로부터 즐겨먹은 질기고 찬 국수다. 그러나 먼저 냉면의 사전적 의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실 냉면이란 말은 한반도 음식문화의 독창적 산물은 아니다. 차가운 국수라는 원뜻으로 보면 중국에도 냉면에 해당하는 여러 면류가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일본의 자루소바도 메밀을 써서 만든 냉면의 범주에 들어간다. 중국 문헌을 보면, 중국 북송대의 유명한 문인 소동파의 글에 이미 남쪽 지방에서 발심면이란 면으로 괴엽냉도(槐葉冷淘)라는 냉면을 만들어 먹는다는 문구가 나온다. 또 6세기 위진남북조시대에 나온 이라는 농사책에도 메밀녹말 반죽이 든 바구니에 쪽구멍을 내고 면발을 뽑아내어 삶아먹는 등 냉면의 원형에 해당하는 면류의 조리법이 소개돼 있다. 당시 중국 문물이 신속히 한반도에 전해졌던 사정을 고려하면, 일찍부터 밀 대신 메밀을 북방 지역에서 널리 재배했던 한반도에서는 뜨겁게든 차갑게든 냉면의 모태에 해당하는 메밀국수를 즐겨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유의 싱그러운 묘사, 오늘날과 다르지 않네

국내 문헌에 국수에 대한 언급은 고려 때부터 나온다. 에 사찰에서 면을 만들어 팔았고, 제례 때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또 12세기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견문기인 등에도 접대용 음식으로 면이 나왔다는 구절이 보인다. 하지만 국수 재료인 밀이 당시 국내 풍토에서 재배되기 어려워 거의 중국에서 수입된 희귀 곡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고려인들은 밀 대신 메밀로 냉면과 온면을 번갈아 만들어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음식사 연구자들의 견해다.

그렇다면 오늘날 흔히 평양·함흥 냉면으로 일컫는 냉면의 원형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구체적으로 냉면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메밀국수에 대한 첫 언급은 17세기 조선의 대문장가였던 장유(1587~1638)의 문집 에 실린 시에 나온다.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란 제목의 이 시는 ‘노을빛 영롱한 자줏빛 육수(紫漿霞色映)/ 옥 가루 눈꽃이 골고루 내려 배었어라(玉紛雪花勻)/ 입 속에서 우러나는 향긋한 미각(入箸香生齒)/ 몸이 갑자기 서늘해져 옷을 끼어 입었도다(添衣冷徹身)’라고 묘사하고 있다. 장유의 싱그러운 묘사는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냉면의 맛, 느낌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신기하다. 자줏빛 육수의 정체가 자못 흥미로운데, 오미자즙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등 조선 후기 음식 문헌에 국수를 오미자국에 만다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그의 시문집에서 벗과 더불어 냉면·온면을 먹는 즐거움을 노래했고, 19세기 초 순조 임금은 야심한 밤에 달 구경을 하다 군직자들을 시켜 냉면을 만들게 한 뒤 같이 먹었다고 후대 중신인 이유원은 그의 저술 에서 전하고 있다.

냉면의 꾸밈새를 구체적으로 밝힌 기록은 1849년의 에 소개된 것을 최초로 본다. 이 문헌에는 ‘겨울철에 무, 배추,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돼지고기를 얹은 것을 냉면이라 한다. 냉면은 겨울철 절식으로 평안도가 최고’라는 문구가 보인다. 헌종 14년인 1848년과 고종 13년 때인 1873년의 봄날 궁중잔치에도 냉면이 쓰였다는 기록이 당시 기록물인 의궤류에 나타난다. 19세기 말 지은 요리책 에는 동치미 냉면, 장국 냉면의 조리법도 언급하고 있다. 구한말 궁중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덕수궁에서 겨울철 야참으로 편육, 배와 잣을 꾸미로 얹은 단 냉면을 즐겼다고 한다( 한복진, 현암사). 냉면은 평양 지방의 향토음식이기는 했지만, 20세기 이전에도 이미 서울과 다른 지방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식사 연구자 윤서석 전 중앙대 교수는 에서 냉면에 대한 관심이 이즈음 높아진 배경으로 19세기 중엽부터 감자의 재배가 확대된 것을 꼽았다. 냉면국수 면발의 점성을 높여주는 녹말을 감자의 대량 재배로 많이 얻게 되어 냉면국수가 널리 퍼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음식사학계 등의 연구와 설명을 들어보면, 이후 냉면이 20세기를 거쳐 국민 음식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크게 3가지 계기를 거쳐 뿌리를 내린 것으로 이야기된다.

아지노모도, 냉면 마케팅을 펼치다

첫 번째 계기는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한 1910~20년대가 기점이다. 이때부터 평양의 냉면은 서울 거리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뜻밖에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처음 등장한 냉장고의 발명이 있었다. 냉장시설 발달로 겨울에만 얼음육수를 공급할 수 있었던 냉면을 여름에도 손쉽게 만들게 되면서, 겨울철 절식에서 여름철 별미로 효용가치가 급상승한 것이다. 사실 양반 궁정요리가 발달한 서울 쪽에서는 설렁탕 외에 딱히 돋보이는 외식거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구한말 이후 외지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색다른 먹을거리에 대한 수요가 생겨난 것도 한몫을 했다. 인천에서는 1893년 이미 평양냉면집이 생겨나고, 서울에도 1920년대 낙원동 평양냉면, 광교 백양루, 돈의동 동양루 등의 가게가 생긴다. 일제 기계틀에서 면을 뽑고, 약간 밍밍하지만 구수한 맑은 육수에 고춧가루 훌훌 뿌린 평양냉면은 곧 서울의 모던보이, 모던걸, 유한층들이 즐겨 배달해 먹는 별식으로 자리잡는다. 음식문화사 연구자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당시 서울의 냉면집 밖에는 커다란 장대에 국숫발처럼 흰 종이를 휘날리는 특유의 선전방식을 써서 화제가 됐다”고 말한다. 이런 인기는 당대 문학작품에도 반영됐다. 작가 김량운이 1926년 8호에 발표한 소설 을 보면, 주인공인 신문기자가 전차를 타고 종로를 지나다 갑자기 냉면이 먹고 싶어 급한 마음에 차장에게 ‘정차’란 말 대신에 ‘냉면’이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나올 정도다.

그렇다면, 냉면이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1920~30년대 당시 냉면의 본고장 평안도 사람들은 냉면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평안도 성천 출신의 참여파 문인이었던 김남천은 1938년 에 실은 수필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쌀로 만든 음식물보다도 이르게 나는 이 국수맛을 알았을는지도 모른다… 누가 마을을 오든가 한 때에 점심이나 밤참에 반드시 이 국수를 먹던 것을 나는 겨우 기억할 따름이다….’ 이 대목에서 서북 사람들에게 냉면은 일상에서 거의 주식과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남천은 뒤이어 화풀이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듯 냉면을 먹는 평안도 사람의 심리를 이야기하고,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도 차 대신 냉면을 먹으러 간다는 일화를 언급하면서 강력한 냉면의 심리적 영향력을 털어놓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와중에 일본의 유명한 합성 조미료 회사인 아지노모토(1960~70년대를 풍미한 국내 조미료 ‘미원’의 일본식 발음이기도 하다)가 냉면 열기에 편승해 조미료 홍보의 일환으로 1920~30년대 조선에서 대대적인 냉면 마케팅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1908년 일본의 이케다가 발명한 감칠맛 조미료 아지노모토는 냉면 육수와 비슷한 맛을 훨씬 싼값에 낼 수 있었는데, 당대 조선에서 ‘신비스런 맛’으로 인식되어 해방 뒤까지 한국인의 미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유명하다. 1910년 조선에 진출한 아지노모토사는 1930년부터 평양과 함흥 지역의 냉면·국숫집을 상대로 ‘면미회’라는 판매 협찬 조직을 결성하도록 독려하면서, 당시 냉면의 맛 재편을 주도한다. 이 사실을 발굴해 2004년 학술지 에 소개한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당시 아지노모토가 냉면집이 많은 평양에 초점을 맞춰 육수와 국물에 조미료를 쓰도록 집중 권유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냉면은 일본 제국주의 자본의 손길 아래 근대의 맛으로 포장됐던 셈이다. 오늘날 육수에 조미료가 범벅된 급속 냉면의 원조는 이미 1930년대 평양 거리의 냉면 면옥집에 나타났던 것이다. 주영하 교수도 이런 사실을 근거로 그 이후 서울과 평양의 근대 냉면은 화학조미료 위주로, 면은 메밀국수에 전분이나 강력점착제를 넣는 방식으로 ‘맛의 타락’이 시작된다고 단언하고 있다. 문인 김남천도 수필 의 말미에서 “시골 외에는 순수한 메밀로 만드는 국수는 극히 희소하다. 국숫발이 질기고 끊어지지 않는 것은 소다나 가타쿠리(녹말가루)를 섞는 탓이라고 한다… 이것은 국수 유사품으로 평양냉면이나 메밀국수와는 친척 간이나 되나 마나”라며 세태에 길들여진 냉면의 변질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전쟁 후 함흥·평양 ‘명가 패밀리’의 형성

두 번째 전환기는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에 따른 월남민 사회의 형성을 들 수 있다. 한국전쟁 뒤는 냉면 외에도 떡볶이, 번데기, 설탕뽑기 등 추억의 근대 군것질거리가 본격적으로 자리잡히는 시기다. 월남한 서북·관북 주민들의 음식 냉면은 각박하고 급박한 세태 정국 속에서 갈수록 짜고 매운 경지로 치달아온 한국인의 맛의 취향에 효과적으로 적응하면서 외연을 부풀렸다. 함경도 실향민들이 특산 녹말국수를 개량하고 가자미회 양념을 곁들여 만든 함흥냉면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다. 냉면은 애초 실향민들끼리 고향의 향토음식을 맛보면서 그들의 향수감을 달래고 유대를 강화하는 먹을거리로서의 의미가 더욱 컸다. 서울 장안 4대 면옥이라 불리는 우래옥, 을지면옥, 평양면옥, 필동면옥, 그리고 함흥냉면의 사대천왕이라는 오장동거리의 흥남집, 오장동 함흥냉면, 신창면옥, 그리고 종로4가 시계방 골목의 곰보냉면, 부산의 원산면옥, 대구의 대동면옥, 강산면옥, 대전의 사리원면옥 등 인척 관계로 맺어지며 계보를 쌓아가는 ‘명가 패밀리’의 뿌리가 이때 형성된다. 또 이들 식당에서 실력을 닦은 조리 장인들이 전국 각지로 퍼져 1960~70년대 잇따라 가게를 열면서 냉면은 전국화의 길을 밟는다.

실향민을 중심으로 향토음식의 성격을 지니며 내실을 다졌던 냉면이 외식산업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다. 밀가루의 대량 유입과 혼분식 장려 등의 정부 시책 아래 식량수급이 안정화하고 급속한 경제발전과 도시의 광역화가 진행되면서 외식산업이 태동하게 된다. 이때 전통의 청요리, 자장면에 맞서 새롭게 전통음식이란 명분을 업고 냉면이 부각된다.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밥은 외식에 들어갈 수 없는 성역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 대용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고 값도 저렴하고 모든 계층이 같이 먹을 수 있는 토착음식 냉면이 서구나 중국의 외식용 음식에 맞서 등장한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로는 함흥냉면, 평양냉면을 서로 섞는 퓨전 현상, 갖가지 변종들이 급속하게 등장하면서 햄버거, 피자, 콜라, 치킨 등에 대항하는 전통 패스트푸드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때 등장하는 갈비 등의 ‘가든’(고깃집) 문화다. 지글지글 석쇠 위에서 쇠고기, 돼지갈비, 삼겹살, 곱창 등을 구워먹고 곧장 냉면으로 입가심하는 무지막지한 외식 트렌드의 등장은 거꾸로 냉면 부흥의 토대가 된다. 외식산업은 외국 패스트푸드의 등장과 함께 급격히 서구화하지만, 전통음식 축에 끼었던 냉면은 오히려 이런 흐름을 보기 좋게 역이용하면서 더욱 호황을 맞게 된다. 사발을 받는 대로 종업원이 싹둑싹둑 면발을 가위질해주는 살풍경한 식사 모습은 냉면의 국민 음식화로 포장됐다. 급기야는 한류 바람을 업고 신종 냉면들은 일본, 중국 등지로도 뻗어가는 양상이다.

한국인의 음식 취향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

2006년 통계청 통계에 나온 냉면 제조업체는 모두 100개. 이들의 연 출하 금액은 683억원에 달한다. 전체 음식점업의 매출액 규모가 50조8900여만원임을 감안하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식당, 고깃집 등에서도 냉면을 메뉴로 내놓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규모는 이보다 최소한 서너 배 이상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실향민 출신의 정통 냉면집 사람들은 냉면산업의 성장에도 제대로 냉면을 조리하는 업주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서울 오장동 신창면옥의 업주인 이점자씨는 “평양냉면뿐 아니라 함흥식 회냉면에서도 조미료를 안 치고 슴슴하게 먹는 것이 원래 방식인데, 마구잡이로 일단 조미료부터 ‘팍팍’ 치고 보는 조리법이 일상화하고 있고, 손님들도 간도 안 하고 주는 대로 먹어버리는 풍토가 일상화해 걱정”이라고 말한다. 은은한 맛을 음미하기보다 바로 입 안의 촉감으로 냉면을 느껴야 흡족해하는 시대로 변해버렸다는 얘기다. 요리연구가 한복려씨는 “냉면 맛이 강해지고 면발이 갈수록 질겨지는 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음식에서도 좀더 구체적인 씹는 맛을 원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며 “냉면은 한국인의 음식 취향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라고 분석했다.

냉면의 맛과 제조법, 먹는 방법의 변천사는 혼돈과 격변으로 얼룩졌던 20세기 우리 근대사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육수와 면발이 들어간 금속 사발에 김치, 무절임이 전부인 단순한 차림 이면에는 고달픈 일상을 감내했던 숱한 근현대 한국인들의 감각과 취향이 묻어 있다. 바로 그것이 냉면이 변함없는 국민 음식으로 사랑받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조금 틀자면, 냉면은 그 자체의 순수한 맛보다 과거와 현재를 곱씹는 생각의 맛으로 즐기는 음식인 셈이다. 최근 수입 쇠고기 파동의 후푹풍을 맞은 냉면의 앞길은 또 어떻게 바뀔까.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