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맹 김진주씨 아버지 김해수의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이화여대 약대를 나온 뒤 백병원에서 근무하다가 박기평(박노해)을 만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4년을 감옥에서 지낸 김진주씨. 그가 아버지의 회고록을 엮어서 펴냈다. (느린걸음 펴냄). 그의 아버지 김해수는 금성사에서 국산 라디오 1호를 만든 인텔리 기술자다. 김해수는 시바우라 공업대학의 전신인 동경고공의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하고 대기업 기술직을 역임했다. 인텔리 기술자의 화려한 이력서지만 아버지의 삶 역시 딸만큼 극적이다. 일제시대와 해방 공간을 겪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삶이었지만 생생한 기억력이 보물급이다.
김해수는 꾸밈말 없이 담담하게 ‘디테일’에 의존하여 풍경을 그린다. 해방을 맞아 고향 하동으로 돌아온 김해수가 동네 총각들과 어울려 군민 위안의 밤에 연극을 올리는 모습을 떠올리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 귀국한 동포인 하나코는 한국말을 일본말처럼 발음하고, 사람들이 웃어젖히자 얼굴을 붉히며 훌쩍훌쩍 운다. 친구 강대봉군은 무대로 올라가서 관중에게 호소를 하고 연극은 재개된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그리운 순간들이다.” 감상은 가볍게 한 줄이다. 돌이키고 되새김한 결과 이렇게 생생해졌을 터이니 그 그리움은 오죽했을까. 그 따뜻했던 강대봉군은 좌익 청년단체 민청에 가입하고 해방 공간에서 죽는다. 덧붙이는 “보도연맹 사건의 희생자들이 어떤 수준의 사람들이었는지, 이름이나 알고, 죽은 장소라도 알고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 결코 나 혼자만의 고집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을 뿐이다”를 울컥하지 않고 지나갈 재간이 없다. 김해수는 강대봉군의 여동생과 결혼을 한다. 김진주씨의 어머니다.
김해수는 일본에서 기술을 익힌 기술자로서 환영받는 삶을 살았다. 징병됐다가 도망쳐간 강원도 광산에서 소장의 전축을 고쳐주어 당장 광산의 전기주임이 된다. 라디오를 척척 고치니 전파상 주인이 애물단지 같은 가게를 싼값에 넘긴다. 소문을 들은 구례, 광양, 남해에서 초청하니 라디오 부속품과 공구를 가방에 넣고 출장 수리를 떠난다. 기술자로서의 극적인 일은 섬진강변 모터수리와 심심산골 지리산 청암골에 전깃불을 밝힌 일이다. 물방아의 수력을 전깃불의 동력으로 이용해 마을 전체에 걸어놓은 전구의 불을 켠다. 극적인 순간을 위해 마을 주민의 재촉에도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 어스름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고치지 못할 병이 몸에 들어와 괴롭히기도 했다. 하동군청 방화 사건으로 열흘을 교도소에서 지내다 폐병을 얻었다. 한쪽 폐를 잘라낸 상태로 평생을 지냈다. 1958년 드디어 금성사에 입사한다. 럭키화학공업사가 낸 ‘고급 기술 간부 모집’ 광고를 보고 시험에 응하는데 그는 1등으로 합격한다. 라디오를 개발하고, 독일 기술자와 부딪히면서 인정을 받고… 가까운 기억일수록 호흡은 더 빠르다
아버지의 고백은 담담한데 김진주씨는 역사를 끌어들여 해석하려 한다. 전기주임으로 징병되어 인천 조병창에 갔는데 “군대와 같은 규율 속에서 조센징을 억압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나의 입지가 몹시 어려워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고 한 그의 글은 김진주씨의 머리말에서 “조병창에 부임하자마자 그곳을 탈출해서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었다. 조선인의 자존심으로 패망해가는 일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한 셈이었는데…”가 된다. 박정희의 도움으로 라디오 1호가 기사회생한 것도 딸은 불편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우리나라의 모든 엔지니어들과 함께 그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다”고 하고 딸은 ‘아이러니’라고 한다. 아버지는 딸이 감옥살이를 하자 슬그머니 ‘대통령 산업포장’ 액자를 책상 서랍에 넣는다. 2003년 말년의 노환으로 쇠약해진 아버지에게 딸은 소일거리로 회고록 집필을 권했고, 2005년 아버지는 출간을 보지 못한 채 사망했다. 향년 8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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