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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을 때려잡으면 ‘서민’에게 이익인가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진보 경제학자의 비판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반론

은 655호(4월17일치, 표지 제목 ‘도둑맞은 미래’) 시대상상 지면에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주요 논점들을 소개하고 진보 경제학자의 비판글을 함께 실었다. 김창근 경상대 교수는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개입을 중시하는 장하준 교수의 ‘발전국가론’을 정면 비판한다. 그는 장 교수가 박정희식 경제발전 모델을 ‘과대평가’하고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만 가능했던 정책이라고 말한다. 또한 재벌의 소유권을 지켜주되 국가가 ‘대타협’을 이뤄 재벌을 규제하자는 장 교수의 주장 역시 재벌도 국가도 원하지 않는 가상의 대안이라고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장 교수는 계급의 문제를 간과해 ‘진보성’을 상실했다고 규정한다. 장 교수가 이 비판에 대한 상세한 반론을 보내왔다. 은 앞으로도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열린 논쟁을 기대한다(의견이나 기고는 bretolt@hani.co.kr로). 편집자

▣ 장하준 교수 케임브리지대·경제학

655호는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라는 기사를 통해 필자의 ‘독특한’ 경제관을 다루었다. ‘장하준’이라는 일개 경제학자의 견해를 세계를 4반세기 동안 풍미한 경제사상인 신자유주의와 동급에 놓고 기획해준 것은 필자 개인으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모든 이론은 똑같다?

물론 의 목적은 필자를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필자의 주장을 소개한 기사와 함께 필자의 입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김창근 경상대 교수의 글이 실렸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의 기획 취지는 필자가 왜 통상적 개념의 좌우 모두와 글자 그대로 ‘좌충우돌’하는가를 함께 생각해보고, 필자가 던진 논쟁적인 화두들을 가지고 우리나라 경제정책에 대해 더 진지한 토론을 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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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취지에서 기획됐기에 이하에서 필자는 될 수 있으면 김창근 교수와 본인이 동의하는 점보다는 견해를 달리하는 점을 부각하며 김 교수의 글에 답을 해보도록 하겠다.

김창근 교수는 필자의 주장을, “재벌들도 원하지 않고 정부는 그럴 의사도 없는” “민주적 발전국가”라는 “가상의 정책”을 “노동자와 농민, 중소기업, 자영업자, 일반 서민” 계급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김 교수에 의하면 필자의 주장은 “과거의 제도들에 매달려 진보성을 상실한” 것이며, 계급론적 시각이 결여돼 있기에 “신자유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장이다.

우선 필자의 주장이 계급론적 관점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김 교수의 주장에는 수긍할 수 없다. 필자는 항상 나름대로 ‘경제학적’ 논리 뒤에 숨어 있는 계급을 비롯한 여러 사회집단들의 이해관계 역학을 분석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분석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을 상시적으로 쓰지 않는다고 해서 계급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이론적 논쟁을 할 계제는 아니지만, 김 교수의 주장은 결국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아닌 모든 이론은 다 똑같다는 말인데, 이는 스웨덴이나 미국이나 다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똑같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또 김 교수가 하는 것처럼 한 가지 기준만으로 이론을 분류한다면(김 교수의 경우에는 계급론적 시각이 그 기준이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한국 경제발전에 국가 개입의 역할을 저평가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나 김창근 교수나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한국의 발전에 국가 역할의 문제는 아래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필자의 ‘진보성’에 대한 김 교수의 판결은 매우 가혹하다. 필자는 계급론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고, ‘노동자와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 등’ 약한 계급들의 이익을 (최소한 김 교수가 보기에는) 옹호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김 교수 견해에 따를 때) 우리나라 ‘진보’에 가장 큰 걸림돌인 재벌들과의 타협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맞고도 틀린 이야기이다. 사실 필자는 지금까지 김 교수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진보적이었던 적이 없다. 그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진보라는 것이 꼭 옳은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김 교수가 필자에 대해 진보성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원래 진보성이 없던 사람이 어떻게 그를 상실할 수 있는가?

문제는 김 교수가 ‘장하준’의 ‘계급 타협에 기초한 민주적 발전-복지국가’ 모델을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진보적’ 대안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김 교수가 위하는 ‘노동자와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선 제기할 의문은 김 교수가 ‘우리 편’으로 치는 집단들 사이에는 이해의 충돌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계급’이 아닌 ‘집단’이라는 표현을 썼다 - 김 교수가 ‘우리 편’에 포함하는 ‘일반 서민’은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모든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중소업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동자와 중소기업이 한편이 될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이 아니고 일상적인 의미에서 ‘착취’를 이야기하면,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들보다 더 가혹하게 착취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로, 조세 저항과 탈루가 높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이해와, 세금으로 복지국가를 만들면 이익을 보는 노동자·농민·서민의 이해는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노무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면서 지적한 것처럼, 농민을 보호하면 식비가 올라가 농민을 제외한 모든 ‘우리 편’이 손해를 본다. 농민보다 다른 ‘우리 편’이 훨씬 수가 많은데, 그렇다면 농민을 희생시키더라도 한-미 FTA를 하는 것이 ‘진보’ 인가? 이렇게 본다면 재벌을 때려잡는 것 말고는 김 교수가 규정하는 ‘우리 편’ 사이의 공통 이해란 찾아보기가 힘들다.

재벌 부정하면 국제 금융자본이 남을 뿐

그리고 설사 백보 양보해서 ‘재벌 타도’가 김 교수가 생각하는 ‘우리 편’에 속하는 모든 집단을 묶을 수 있는 의제라고 하더라도, 과연 재벌을 때려잡는 것이 과연 ‘우리 편’의 이익이고 ‘진보’인가?

여기서 문제는 가능한 대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우리 노동자가 재벌과 타협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때 그 밑에 깔려 있는 생각(계급 분석이라는 거창한 말은 쓰지 않겠다)은, 우리의 주어진 현실 속에서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가장 유리한 것은, 재벌들을 외국 금융자본에서 보호해주는 것을 대가로 그들에게 복지국가와 적극적인 정부 규제를 받아들이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세부 상황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그림을 그려 이룬 것이 스웨덴, 핀란드 등 북구 사민주의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나 ‘장하준’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김 교수의 입장에서, 우리나라가 설사 그런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스웨덴이나 핀란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서 산업정책보다는 냉전체제의 특혜와 노동자의 ‘초과 착취’가 더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국가 역할의 재정립을 외치는 필자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재벌을 부정하면 우리에게 남는 대안은 국제 금융자본이 들어와 단기 이윤을 위해 경제를 굴리는 것이다. 이미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목격한 대로, 이 체제는 저투자, 저성장, 저고용 그리고 고용불안을 불러온다. 이렇게 볼 때, 자본의 횡포에 저항하는 입장에서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재벌을 응징하는 것은, 여우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들이는 격이다. 재벌들은 그나마 이씨 가족, 정씨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실체가 있고, 과거에 국민들에게 진 빚, 잘 알려진 나쁜 행실의 기록 등 약점이 많아 싸우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재벌총수 가문들을 쫓아내고 국제 금융자본이 우리 경제를 장악하게 되면, 우리는 뉴욕과 런던에 앉아 있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펀드 매니저들과 싸워야 한다. 더욱이 이런 펀드들은 상장된 기업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펀드들에 들어 있는 돈이 우리나라 재벌들보다 더 나쁜 일들(예컨대 무기 밀매, 마약 밀수, 인신 매매)을 하여 모은 것이라고 해도 알 길은 없다. 설사 불미스러운 일이 밝혀져도 이런 펀드들은 여차하면 떠날 수 있기 때문에 국내 여론에 별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박정희, 냉전이나 ‘초과 착취’덕만은 아니다

김 교수의 비판이 ‘대안’의 문제에 소홀한 것은 국가의 역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국가 정책을 잘 써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가 냉전구조에서 차관도 예외적으로 많이 받고 수출시장 접근도 손쉽게 하는 가운데 노동자를 ‘초과 착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는 국가 역할의 재정립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의 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이 그렇게 중요치 않은 것이었는가?

우선 냉전의 역할부터 살펴보자. 우리나라가 1950년대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해외 원조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이 중 많은 부분은 냉전이 ‘뜨거워져’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것을 복구하는 데 들어갔고, 이미 1960년대가 되면 1인당 원조 수령액이 개발도상국 평균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냉전의 산물인 남북 대립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다른 나라들이 평균적으로 국민소득의 2~3%를 국방비에 쓸 때 우리는 6%를 써야 했다. 냉전 때문에 한국이 미국 시장에 더 쉽게 접근했다는 것도 종속이론가들 사이의 ‘전설’이지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냉전구조는 우리 경제발전에 기여를 했다기 보다는 도리어 더 손해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경제발전이 노동자의 ‘초과 착취’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초과 착취’라는 개념이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김 교수가 ‘초과 착취’를 이야기할 때 마음에 두고 있는 저임 수출가공 산업에 기초한 경제발전 모델은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저임 수출로 번 외화를 사용해 자본재와 기술을 사들여 고부가가치 산업을 세우고, 정부가 산업정책을 통해 그 산업들을 잘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밉다고, 지금 정부 관료들이 문제가 많다고 국가의 역할을 원론적으로 부정해버려서는 안 된다. 역시 또 문제는 대안이다. 김 교수가 바라는 대로 ‘진보적’이고 ‘자본 편향적’이 아닌 국가 개입의 모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미 그 실패가 낱낱이 드러난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가끔 이야기하던, 국가가 소멸한 목가적인 공산주의 사회인가? 둘 다 아니라면, 결국 개입주의적 국가 역할의 재정립이 ‘진보적’ 의제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본의 아니게 자유방임주의를 지원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김 교수가 정확히 지적하는 대로 지금 정부를 움직이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대부분은 필자가 주장하는 식의 대안을 채택할 의사가 없다. 그리고 재벌들도 국제 금융자본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기로 마음을 먹은 듯한 곳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을 고민하자

그렇지만 필자가 내세우는 ‘계급 타협에 기초한 민주적 발전-복지국가’ 모델이 그래도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협소한 계급론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사회 통합을 추구한다는 광범한 의미에서) ‘진보적’ 대안일 수도 있다면, 진보를 자부하는 사람들은 정부와 재벌들이 싫어하더라도, 아니 싫어하기 때문에라도, 그러한 모델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필자가 하는 주장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돼온 (종속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묘하게 섞여 있는) ‘진보’라는 기준에 여러 가지로 어긋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김창근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에서 지적했듯이, 필자는 이러한 ‘진보주의’가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나, 현재에 가능한 대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면이 많다. 물론 필자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나름대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로 내놓은 필자의 제안들이 기존의 ‘진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필자는 ‘진보적’이 아니라고 비판받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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