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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가 쏘아올린 작은 희망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전 국가대표 최장신 센터 김영희씨, 죽음 직전까지 도달해서 찾은 생의 의미

▣ 송호진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dmzsong@hani.co.kr

“누추하죠?” 낮인데도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햇빛은 도화지만 한 창문이 걸린 8평 단칸방까지 공평하게 스며들지 못했다. 방바닥에 앉으면 혼자 일어날 수 없는 그는 의자에서 인사를 건넸다. 손과 발은 바람이 들어간 듯 여전히 부풀어 있었다. “괜찮으세요?”라는 말을 끊은 건 그의 웃음이었다. “눈도 퉁퉁 부었었는데, 속쌍꺼풀이 보일 정도로 빠졌죠? (전 국가대표) 박찬숙 언니가 ‘너 국수 먹을 일 있니?’ 하고 물어요. 그래서 ‘언니, 내가 시집가면 세계 코끼리들이 축하하러 오느라 천지가 흔들려’라고 말했죠.” 키가 커 현역 시절 ‘코끼리’라 불린 여자농구 국가대표 센터 출신 김영희(45)씨. 키가 2m5cm인 그는 한국에서 가장 큰 여자다.

방에 틀어박혀 구름과 얘기하던 시절

5년 전, 부천 오정동으로 왔을 때 그는 늘 그래왔듯 아이들의 놀림거리였다. “아침마다 집 앞으로 몰려와 ‘거인 나와라’고 소리치더라고요. 얼굴을 내밀면 ‘엄마야~’ 하면서 무섭다고 도망가고.” 그는 주머니에 사탕과 과자를 넣고 아이들을 만났다. “‘너희가 놀리니까 가슴 아팠어. 이렇게 보니 아줌마 착하지?’ 하고 다가갔죠. 애들이 ‘거인 아줌마가 먹을 것도 준다’며 소문을 내더라고요.” 동네 어른들이 330mm 신발을 보고 “항공모함이 따로 없구만” 하고 놀라시면, “할아버지, 이 배 타고 노 저어서 유럽여행 다녀오세요”라고 맞장구를 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원래 이렇게 컸던 것도, 남들 앞에서 당당했던 것도 아니었다.

너무 작게 태어나 친할머니가 절에서 100일 기도를 드렸다는 대목에선 그도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165cm)와 어머니(163cm)도 큰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또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다녔단다. 6학년 때 180cm가 넘었다는 얘기가 이어지자 그의 목소리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는 배구를 하다 “넌 공을 받아 바구니에 넣기만 하면 돼”라는 권유를 받고 중학교에 들어가 농구공을 잡았다. 중학교 졸업 무렵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연고 계약을 맺은 그는 서울 제기동 집 한 채까지 받는 호사를 누리며 부산을 떠났다. 물론 키 덕분이었다. 농구계는 당시 중공(현 중국) 장대 선수들에 맞설 숭의여고 학생의 출현에 들떴다.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수록 그는 거울을 피했고, 자꾸 커져가던 자신을 혐오했다. 198cm이던 고2 때 태극마크를 단 김영희는 느린 스피드가 늘 문제였지만, 중공의 진월방(2m7cm·심장병 등 합병증으로 2000년 37살에 사망)과 정하이샤(2m4cm)를 막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화장품에서 뛰던 ‘83년 점보시리즈’ 때 지금도 깨지지 않는 1경기 60점을 넣는 등 개인 타이틀 5관왕을 휩쓸기도 했다. 1987년 뇌종양으로 반신마비가 와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래도 살 만한 인생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고, 거인병(말단비대증)에 걸렸다는 건 2002년이 돼서야 알았다.

“거울을 보지 않으니 얼굴이 변하는 것도 몰랐죠. 밖에 나가면 놀리니까 방에만 틀어박혀 구름하고만 얘기했어요. 눈만 뜨면 ‘날 왜 이렇게 크게 만들었나’ 하며 원망도 했고.” 어머니가 1998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뒤 그는 급격히 무너졌다. “추울 때 돌아가셨는데 ‘옷은 입고 계실까, 따뜻한 밥은 드시나, 상처만 드렸는데’ 하는 생각에 6개월간 물도 먹지 않았어요. 암에 걸린 아버지는 통증 탓에 방에서 데굴데굴 구르시고, 난 밤새 울고. 130kg이던 몸무게가 70kg 정도까지 빠졌죠. 소변이 그냥 흘러나올 정도였어요. 아버지가 ‘딸 죽는다’며 사골 국물을 사와도 먹고 다시 뱉고 그랬죠. 맥이 안 짚어질 정도로 죽기 직전까지 갔어요.”

아버지도 2000년 추운 겨울 암으로 눈을 감았다. “올케가 참 착한데 ‘자꾸 아무것도 안 먹으시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은 누굴 의지하느냐’고 얘기하는 거예요. 엄마가 생각났죠. 돌아가시던 날, ‘영희야 힘내라, 힘내라…’라고 말하시며 보던 눈빛. ‘넌 시집도 못 갈 텐데, 너 혼자 어떻게 살아가냐. 네가 먼저 베풀어라. 그러면 사람들이 널 다른 눈빛으로 볼 것이다’는 생전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살아 계실 땐 ‘그만 좀 해’ 하고 소리쳤는데….”

눈 밑에 있는 이웃들을 발견하다

그의 힘겨운 생활이 알려진 뒤 선후배, 이름 모를 팬들의 도움이 전해지면서 ‘거인’도 힘을 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좌우, 아래만 볼 수 있는 그의 눈으로 밑에 있는 이웃들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체육연금 월 20만원을 아끼고 쪼개 어려운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떡과 죽을 대접했다. 아래층 소녀 가장에게도 손길을 뻗었다. 팬이 만들어준 ‘코끼리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블로그에서 세상과도 소통했다. “정신지체아 시설도 다녔는데 처음엔 애들이 무서워서 안 오더라고요. 50명한테 양말을 일일이 신기고 농구공을 주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김영희가 “병원, 농구체육관에 갈 때 날 부축해주는 경호원”이라 부르는 85살 옆방 할머니도 그렇게 만났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3년 전 넘어져 3개월을 누워 있었는데, 글도 모르는 날 누가 들여다보겠어. 이 사람이 밥도 해주고 말벗이 돼주는데, 어찌나 고마운지. 그 은혜를 잊지 못해요”라며 고마워했다.

김영희는 주변의 후원으로 한 달에 한 번씩 140만원짜리 성장억제제를 맞는다. 키는 다 자랐는데, 심장 등 장기까지 비대해져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절 통증도 많이 없어졌어요. 피부도 고와졌죠?” 그는 3년 전 LA올림픽 당시 감독이었던 조승연 서울 삼성 농구단 단장 환갑연을 떠올렸다. “부부 동반이었는데 전 남동생과 갔어요. 선수 시절 움츠러들기만 했는데, 그땐 마이크를 딱 잡았죠. 그러곤 노래 를 불렀어요.” 그러더니 그는 ‘심진 스님’이 지은 시에 붙인 노래 한 구절을 불렀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가사가 참 좋아요.”

“흐르는 물도 이젠 그냥 보이지 않아요. 물이 흐르면서 바위에 부딪혀 멍도 들지만, 그걸 참고 가다 보면 바다에 다다르잖아요. 저요, 농구선수 하며 훈장도 타고, 외국도 나가고, 화려한 추억도 만들었잖아요. 장기 기증을 할 겁니다. 제일 큰 여자가 있었는데 참 좋은 여자였다는 기억은 남겨야 하잖아요. 죽으려고 했을 때 꿈에 매일 나타났던 엄마도 이젠 안 나와요. 구천을 떠돌다 마음 놓으시고 하늘로 가셨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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