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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세대교체, 유도만 같아라

등록 2008-01-25 00:00 수정 2020-05-03 04:25

50명 대표팀 예비명단 발표한 허정무 감독, 미래 좌우할 세대교체 ‘물 흐르듯’ 해야

▣ 신명철 편집위원

올해 한국 축구를 대표할 선수들의 이름이 1월17일 밝혀졌다. 국내 감독으로 7년 만에 국가대표팀을 맡은 허정무 감독은 이 선수들을 이끌고 1월30일 칠레와의 평가전과 2월6일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투르크메니스탄전(이상 서울 월드컵경기장), 그리고 2월17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충칭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선수권대회를 치를 예정이다. 이번 대표팀은 동아시아선수권대회와 월드컵 예선에서 모두 세 차례 남북 경기를 갖게 돼 축구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비명단 중 23살 이하 선수가 11명

그런데 축구팬들은 이보다 앞서 발표된 50명의 예비명단에 주목했다. 정예 선수 20여 명으로 대표팀이 꾸려졌지만 예비명단에는 앞으로 한국 축구를 이끌 선수들이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38살의 노장 김병지부터 19살의 샛별 구자철에 이르기까지 국내외에서 공을 좀 찬다는 선수는 모두 이름을 올렸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올림픽대표팀 연령대인 23살 이하 선수가 11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30살 이상 선수는 김병지 외에 이영표, 김남일, 이관우 등 4명으로 비교적 적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 멤버 가운데에서는 안정환을 비롯해 김영철과 송종국 등이 빠졌다. 예비명단에 든 50명 가운데 상당수가 2010년 월드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물론 최종 예선을 통과해야 하지만.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 지역예선 통과라는 당장의 목표와 함께 최소한 2, 3년 뒤를 대비한 세대교체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세대교체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언제나 관심사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70년대 초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정치판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야당 중진들이 ‘구상유취’라며 40대 정치인들의 돌풍을 견제하려 했지만, 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선 제1 야당의 후보는 40대 김대중이었다. 두 전직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 수 있게 되기까지 그 뒤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지만, 1970년대에 불러일으킨 세대교체 바람은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2007~2008 시즌 프로배구에서 애초 예상을 깨고 1월15일 현재 11승2패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삼성화재는 지난해 세대교체 문제와 관련해 심한 몸살을 앓았다. 10년 가까이 팀을 이끌었던 신진식과 김상우의 유니폼을 선수의 의지와 관계없이 벗겼기 때문이다. 은퇴하는 과정과 두 선수가 그동안 팀 안에서 차지했던 비중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올 시즌 삼성화재가 고전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삼성화재는 이런 예상을 뒤엎고 이번 시즌에도 챔피언 결정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세대교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치판에서 세대교체는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이어진다. 기성세대는 쉽사리 자기 자리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대교체는 이뤄지게 돼 있다. 정치판에서 선거를 계기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듯, 스포츠에서는 특정 대회를 맞으면서 선수들의 물갈이가 이뤄진다.

껄끄러웠던 삼성화재, 아까웠던 허구연

아마추어 종목의 경우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 같은 대규모 국제 종합경기대회 때 새로운 선수들이 등장하곤 한다. 축구의 경우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세대교체가 어느 정도 이뤄져야 했지만 바로 다음해인 2007년에 아시안컵이 있어 핌 베어벡 전 감독이 머뭇거린 면이 있다. 시기적으로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허정무 감독은 제때 세대교체의 칼을 빼든 것이다.

그런데 세대교체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세대교체는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고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선수를 밀어내기식으로 내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결과가 좋게 나왔지만 삼성화재 배구단의 세대교체 과정은 그리 매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SK 와이번스를 창단 7년 만에 국내 프로야구 정상에 올려놓은 김성근 감독은 올해 66살이다. 정년퇴직을 했어도 벌써 했을 나이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40, 50대 감독 못지않은 날카로운 분석력과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으로 지도자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는 1990년대 후반 한때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40대 감독들이 대거 등장했다. 상당수의 노장 지도자들이 등을 떼밀리듯이 현장을 떠났다.

물론 이전에도 젊은 지도자들의 돌풍이 있기는 했다. 1985년 후반기 야구해설가 허구연이 청보 핀토스 사령탑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34살이었다. 허구연은 그때 감독이 되는 걸 무척 걱정했다. 실업야구 한일은행 시절 다리를 크게 다쳐 비교적 일찍 선수생활을 마감한 허구연은 은퇴한 뒤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현장 경험이 없었다. 코치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삼미 슈퍼스타즈를 인수한 청보식품에서 그라운드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겠다며 해설자로 이제 막 자리를 잡은 허구연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허구연은 지인들의 의견을 종합한 뒤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지도자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6년 청보 감독을 그만둔 뒤 고향팀인 롯데 자이언츠 코치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결국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허구연이 코치부터 시작해 현장 경험을 쌓고 적당한 나이에 감독이 됐으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마라톤은 10년 넘게 이봉주, 이봉주…

국내 여러 스포츠 종목 가운데 비교적 세대교체가 잘 이뤄지는 게 유도다.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종목은 마라톤이다. 유도의 경우 특히 경량급은 올림픽 때마다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며 꾸준히 메달을 따고 있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장은경은 당시 최경량급인 63kg급의 은메달을 차지했다.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건너뛰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는 당시 나이 20살의 김재엽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988년 서울 대회에서 대망의 금메달을 손에 쥐었다. 김재엽의 체급은 63kg급에서 하향 조정된 60kg급이었다.

60kg급의 메달 행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는 윤현이 은메달,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는 정부경이 은메달,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최민호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선수층이 두꺼운데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올림픽 때마다 선배가 물러나며 세대교체가 이뤄진 결과다. 어느 대회에서는 후배가 선배에게 대표선수 자리를 양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마라톤은 답답할 정도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봉주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건 12년 전인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다. 그때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마라톤의 경우 몸관리를 잘하면 30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인이 30대 후반까지 마라토너로 활동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오는 8월 열리는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한국 마라톤은 이봉주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유도와는 대조적으로 선수층이 두껍지 못해 세대교체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한국 축구는 올해 월드컵 예선과 올림픽 본선을 치른다.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 4강의 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국 축구가 세대교체의 성공 여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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