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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빛 하늘에 탱고 음악이 흐르면

등록 2007-12-07 00:00 수정 2020-05-03 04:25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에 빠져 장기기증하고 떠난 김민우 전 아이스댄싱 국가대표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아기를 임신했는데 소변에서 단백질이 그냥 새나왔다. 신장(콩팥)은 있어도 있는 게 아닌 게 됐다. 말기 신부전증이었고, 가벼운 뇌경색도 왔다. 몸 일부도 마비됐다. 말도 더듬더듬 나왔다. 투석을 받으며 기다린 지 6년째. 딸을 둔 이 40대 중반 엄마에게 느닷없이 큰 선물이 왔다. 의사들이 봐도 너무나 깨끗하고 건강한 신장이었다. 다들 행운이라 했고, 그동안 딸과 여기저기 다니지 못해 가슴 아팠던 엄마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도대체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건 일흔을 넘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각막 둘을 선물받아 두 눈의 어둠을 인생 황혼 녘에 비로소 걷어냈는데 마땅히 감사 인사를 하러 갈 방도가 없으니 미안해서 어쩌냐는 것이다.

그즈음 심장을 받은 서른여섯 살의 남성도, 신장과 췌장을 얻은 40대 초반 아저씨도, 간을 받은 40대 후반 중년 남성도 그렇게 못 살게 굴던 병마를 훠이훠이 쫓아버렸다.

밤늦게 훈련 마치고 귀가하다 사고[%%IMAGE4%%]

누군가의 가슴 뛰는 새 출발. 그건 그들에게 전해진 선물 꾸러미를 한 몸에 다 품고 있던 김민우(22), 바로 그의 ‘끝’에서 시작됐다.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후배들을 밤늦게까지 가르치고 차를 몰아 서울 집으로 가던 10월3일 새벽. 교통사고였다. 군 입대를 꼭 열이틀 남겨둔 날이었다. 제대하면 괜찮은 후배들을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꿈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서 깨어나야 했지만, 그는 의식불명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 아들이 그렇게 갑자기 가다니, 너무 아까웠지요. 포부도 큰 아이였는데. 사실 내 아들 몸에 칼을 대는 걸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전부터 우리 가족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장기는 조금이라도 일찍 기증해야 좋다고 하는데, 식구 누구라도 반대했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을 빨리 돕지 못했을 겁니다.”

아들은 이미 짝을 찾아간 장기 외에도 뼈·골수·연골 등 신체조직까지 새 주인과 연구팀을 위해 가져가지 않았다. 아버지 김옥열(56)씨는 “나도 아들처럼 장기기증을 하려고 서류까지 다 준비해놓았다”고 했다.

‘마음을 좀 추스르셨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많은 분들에게 빛을 줬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고 마음도 편해졌다”고 했다. 사실 49재를 막 지냈으니 마음이 잘 아물지 않았을 거라 짐작이 되는데도 그는 그걸 꾹꾹 누르고 있었다.

김민우. 그는 분홍색 넥타이를 매거나, 노란색 재킷을 입고 빙판에 섰다. 때론 그럴싸한 파티에 온 듯 흰색, 검정색 턱시도를 골랐다. 피아노 음들이 빙판에 또르르 떨어지면 그는 그걸 쫓아갔다. 그러면 춤이 됐다. 경쾌한 팝 음악이 얼음 위에서 통통 튀어오르면 그도 튀어올랐다. 남들은 “표현력이 좋다”고 했고, 가족들은 “민우는 빙판에서 참 자유로웠다. 그곳에서 즐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빙판을 돌기도 했고, 손을 잡아당겨 그 여자를 빙그르 돌리기도 했다. 그의 파트너이자 한 살 위 누나, 혜민이었다. 둘은 마지막까지 남은 국내 유일한 피겨스케이팅 아이스댄싱 국가대표였다. 남매가 아이스댄싱의 같은 팀이 된 건 국내 처음이었다. 빙판에서 늘 같이 춤을 췄던 동생. 누나는 두 달 전 아픔을 다시 떠올리는 걸 버거워했다. 그는 “애교가 많았다. 아이스댄싱을 동생이 참 좋아했다”고 했다.

자비로 국제대회 준비해야했던 남매팀

현 빙상연맹 심판인 아버지는 리라초등학교 피겨 지도자를 지냈다. 남매는 자연스레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됐다. 남녀 피겨 싱글로 뛰던 남매에게 주변에서 아이스댄싱을 권했다. 피겨는 싱글·페어·아이스댄싱으로 나뉜다. 페어는 남녀가 같이 점프와 회전 등을 연기한다면, 아이스댄싱은 여자를 어깨 위로 들어올리지 못하는 빙판 위 볼룸댄스와도 같다. 손을 맞잡고 연기하는 아이스댄싱은 남녀 사이가 틀어지면 팀도 깨지고 만다. 남매에게 아이스댄싱을 권한 건 ‘천륜’으로 맺어진 가족이라면 웬만해선 팀이 깨지지 않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남매가 같이 붙어다닐 수 있어 좋겠다고 여겼다”고 했다.

그는 13살에 누나와 한 조가 됐고, 16살에 중국에서 열린 주니어그랑프리에 나가 국제대회에 첫선을 보였다.

남매의 동행. 사실 그건 외로운 길이었다. ‘양태화-이천군’조가 2002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이후 은퇴하면서 남매는 홀로 남겨진 아이스댄싱팀이 됐다. 국내 빙판은 경쟁자 없는 곳이 됐다. 출전하면 1등. 누나는 “자극이 없으니 우리끼리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도 컸던 것 같다”고 했다. 발레 안무 지도를 받기 위해 한 해 2천여 만원의 자비를 들여 해외 훈련을 가야 했다. 없는 살림에 코치도 개인적으로 구해야 했다. 아버지는 “국가대표여도 연맹 지원이 없으니 솔직히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연맹은 피겨스케이팅이 국제대회에 나가 뚜렷한 결과를 낼 가능성이 없으니 선뜻 지원하지 못했고, 이건 선수들이 제 풀에 지쳐 포기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남매는 시니어 대회론 처음 나간 2003 아오모리 겨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6위 성적으로 선전을 펼쳤다. 그러나 남매는 지난해 초 미국에서 열린 4대륙 피겨선수권에서 세계의 벽을 또 실감한 채 국가대표팀에서 내려왔다. 이로써 피겨스케이팅 페어가 20년 가까이 후계자를 찾지 못한 데 이어 아이스댄싱도 대가 끊겼다. 남자 싱글 국가대표도 이동훈(21)이 홀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누나는 “자비로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좀 힘들었다”고만 했다. 아버지는 “민우는 더 하고 싶어했지만 계속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선수로서 꿈을 접고 지난해부터 누나와 같이 과천 빙상장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된 건데…. 만약 선수 생활을 계속했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빙판 위로 흐르던 탱고는 꺼지고

이제 빙판엔 ‘피겨 요정’ 김연아의 주제곡 은 울려퍼지지만, 누나와 춤을 추던 김민우의 탱고 음악은 꺼졌다. 그러나 그 음악을 후배들을 통해서라도 켜고 싶어했던 그의 꿈까지 꺼지진 않았으면. 아버지도 아들이 남긴 탱고 리듬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듯했다. “우리 아들도 여러 사람들의 몸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느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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