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일본을, 대만은 한국을 넘겠다는 경쟁의식으로 발전해 온 아시아 야구
▣ 신명철 편집위원
야구와 관련해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일본·대만의 경쟁 관계는 ‘야구 삼국지’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가 없다. 물론 3강이 팽팽하게 맞서는 관계는 아니고, 일본-한국-대만의 서열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기는 하다. 그러나 주요 국제대회에서 이 3개국은 이따금 기존 서열을 깨는 이변을 일으켜, 야구팬이 손에 땀을 쥐고 라이벌전을 보게 만든다. 한국은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3위 결정전에서 이승엽(31·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물리쳤고, 지난해 3월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일본을 두 차례나 꺾었다.
반면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대만에 발목을 잡혀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3국은 물고 물리는 관계의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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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베이징올림픽 예선전을 겸해 지난 12월2일 대만 타이중에서 열린 제2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한국과 일본 경기 1회말 공격에서 한국 이택근 선수(현대 유니콘스)가 2루에서 태그 아웃을 당하고 있다. 이날 한국 대표팀은 대등한 경기를 펼쳤지만, 결국 3-4로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사진/ REUTERS/ PICHI CHUANG)
아시아야구대회 초대 챔피언은 필리핀
12월3일 막을 내린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본선 직행 티켓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지만, 원래 이 대회는 제2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로 올림픽 예선을 겸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도 일본-한국-대만의 순서는 미세한 차이이지만 다시 한 번 드러났다. 한국은 대만을 5-2로 꺾었지만, 일본에는 3-4로 무릎을 꿇었다. 대만 역시 일본에 2-10으로 역전패하면서 이번 대회에 걸렸던 베이징행 티켓 1장은 일본이 차지했다.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1954년 5월 결성된 아시아야구연맹(BFA)의 첫 번째 사업으로, 그해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렸다. 창립회원은 한국·일본·필리핀·자유중국이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건국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아 국제무대에 나설 상황이 못 돼, 대만 정부가 스포츠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중국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당시 대만 정부를 ‘자유중국’으로 부르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필리핀은 이때만 해도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이었다. 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의 바통을 이어받아 1954년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를 마닐라에서 열었다. 아시아경기대회가 그해 5월에 있었으니 필리핀은 그해 주요 국제대회를 잇따라 연 셈이다. 필리핀은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4위를 한 데 이어 자국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일본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1962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대회까지 필리핀은 한국보다 좋은 성적을 올렸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초대 챔피언도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특히 야구와 남자농구가 강해 한국의 스포츠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김영기·신동파로 대표되던 1960~70년대 한국 남자농구의 라이벌은 필리핀이었다. 그런 필리핀이 이번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라고 불린 B조 예선에서 타이·파키스탄·홍콩 등과 경기를 치러, 2승1무로 결선 리그에 오른 것을 보면 금석지감을 느낀다.
야구장 부실해 개최 포기했던 5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1955년 또다시 마닐라에서 제2회 대회가 열렸다. 대회 기간에 열린 아시아야구연맹 총회는 선수권대회를 2년마다 열기로 하고, 1957년 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올드팬들이 기억하듯이 당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수용 규모는 7천 명 정도였고, 외야는 관중석이 없었다. 프로야구 초창기 OB 베어스가 홈구장으로 쓴 대전구장을 떠올리면 당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허약하기만 했던 당시 정부의 재정은 야구장 증설 공사조차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1957년 5월 아시아야구연맹에 대회 반납을 통보했다.
그래서 제3회 대회는 1959년 도쿄에서 열렸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무리하게 서울에 유치했다 반납한 것과 같은 일이 1950년대에도 있었던 게다. 한국이 반납하고 일본이 대신 치른 제3회 대회에서 한국은 아마추어에서만큼은 일본과 겨뤄볼 만하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야 하는 충격적인 패배를 했다. 특히 1차 리그에서 당한 1-20 대패의 상처는 컸다.
이 무렵 일본 야구는 프로의 경우 1950년 단일 리그에서 센트럴·퍼시픽 양 리그로 분리 확대돼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는 사회인 야구 선발팀과 와세다·게이오 등 도쿄 6개 대학 선발팀이 번갈아 나오고 있었다. 한국은 실업 선발팀이었지만 사실상 야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이어서, 대패의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한국은 1961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벌어진 제4회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 뒤, 1963년 9월 서울에서 열린 제5회 대회에서 드디어 아시아 야구 정상에 서며 프로를 뺀 경기에서는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올라섰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첫 우승의 멤버는 신세대 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이들은 이후 지도자로 활동하며 한국 야구 발전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끈 김응룡(1루수), 롯데 자이언츠 초대 감독 박영길(외야수),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 박현식(작고·외야수) 등이 그들이다. 최관수(작고·투수)는 1970년대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지도했다.
김응룡은 한국이 대회 우승을 확정짓는 2차 리그 일본전 1회 1사 3루에서 중견수 희생 플라이로 선제점을 뽑았다. 또 8회 무사 1루에서는 승부에 쐐기를 박는 중월 2점 홈런을 터뜨렸다. 내·외야를 감싸고 있던 미루나무를 베어내고 관중석 확장 공사를 마쳐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야구장과 비슷한 모양을 갖춘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김응룡은 타격상과 홈런상을 받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활약한 이승엽의 37년 전 모습이 김응룡이다. 한-일 라이벌전은 세월을 뛰어넘어 언제나 뜨거울 수밖에 없다. 이때까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는 야간경기를 하기 위한 조명 시설이 없었다.
첫 우승 선물은 경기장 야간 조명
첫 우승의 감격을 뒤로하고 선수단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을 방문해 박정희 의장에게 승전 소식을 알렸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그해 12월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데, 이때만 해도 최고회의 의장 신분이었다. 17년 뒤 신군부를 이끌고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흉내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박 의장을 만난 자리에서 선수들은 한국 야구 발전에 큰 도움이 된 한 가지 약속을 얻어냈다. 서울운동장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야간경기 조명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책정했던 서울시 예산이 풍수해 복구 사업에 쓰이는 등 우여곡절 끝에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야간경기 조명 시설이 설치된 건 그로부터 3년 뒤인 1966년 9월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인 육영수씨와 점등식에 참석했고 시구도 했다. 그러나 그 무렵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야간경기는 낭비라는 지적이 있었고, “하루 기본 사용료가 2만5천원으로 너무 비싸니 인하해달라”는 야구계의 요구도 있었다.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불과 40년 전에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한국 야구는 이제 일본과 프로끼리 붙어도 1점 차로 승부가 갈리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꼭 이겨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다. 이는 비단 야구만의 일이 아니다. 6인제가 도입된 1960년대 한국 배구는 일본과 싸우면 남녀 모두 세트 스코어 0-3 패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한국은 일본을, 대만은 한국을 넘겠다는 경쟁의식 속에 아시아 야구는 발전했다. 세 나라 모두 메이저리그에 많은 우수 선수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드러나지 않은 3%의 진실
▶대입 막판 초치기, 돌아버린 돈돈돈!
▶그렇게 싫다더니 광고는 다 따라하네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왜 ‘경제’에 표를 던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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