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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한일전은 언제입니까

등록 2008-03-07 00:00 수정 2020-05-03 04:25

일제강점기부터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 그대로 보여주는 축구 한-일전의 역사

▣ 신명철 편집위원

또 한 차례의 축구 한-일전이 치러졌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팀은 2월23일 중국 충칭 올림픽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제3회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마지막 경기에서 일본과 1-1로 비겼다. 종합전적에선 1승2무로 일본과 승점이 같았지만, 다득점에서 앞서 2003년 제1회 대회 이후 5년 만에 다시 우승했다.

한국은 전반 14분 박원재의 왼발 크로스를 염기훈이 왼발 발리 슈팅으로 멋지게 연결해 지난 2003년 5월31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친선 A매치에서 안정환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긴 뒤 4년8개월여 만에 한-일전 승리를 기록하는 듯했다. 그러나 후반 22분 야마세 고지에게 뼈아픈 동점골을 내줘 1-1로 비겼다. 일본이 코너킥을 하는 순간 축구화 끈을 매고 있는 선수가 있었는가 하면 코너킥을 차는 곳을 등지고 있는 선수도 있어 젊은 선수들 위주로 짜인 대표팀의 집중력이 아쉬웠다.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몸 던지겠다”

이번 경기는 1954년 3월7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1954년 스위스월드컵 예선 1차전에서 한국이 5-1로 크게 이긴 이후 70번째 한-일전이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올림픽대표팀끼리 벌인 경기도 포함된 전적이다. 1990년대 이후 올림픽 축구 출전 선수들의 나이가 23살 아래로 제한되면서 올림픽대표팀 간 경기는 국가대표팀 간 전적에서 빠졌다.

축구 한-일전에 얽힌 일화는 다른 종목의 한-일전과 관련한 얘깃거리를 다 모아놓은 것만큼이나 많다. 두 나라의 역사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종목이 축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제강점기 축구는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이 무렵 열린 일본 내 주요 대회에서 조선 지역 팀들이 거둔 성적은 눈부셨다. 교토 퍼플상가 시절 박지성이 누비기도 했던 FA컵 격인 일왕배일본축구선수권대회는 1921년 창설됐다. 일본축구협회는 1935년 베를린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대표팀의 전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 대회에 조선팀 참가를 처음으로 허용했다. 대회는 6월 도쿄에서 열렸는데 조선축구협회는 한 달 앞서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해 조선축구단을 꾸렸다. 이 팀에는 한국 축구의 영원한 스승 김용식 선생, 발이 엄청나게 빨라 ‘군산 오토바이’라는 별명이 붙은 채금석 선생 등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축구단은 준결승에서 나고야팀을 6-0으로 대파했고 결승에서는 문리대학을 6-1로 꺾고 우승했다. 이듬해 대회에는 보성전문 단일팀이 출전해 결승에서 게이오대에 2-3으로 져 준우승을 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회가 중단될 때까지 보성전문, 연희전문 등이 출전해 꾸준히 상위권에 들었다. 1936년 이후 1942년까지 일본 대표팀에 뽑혀 활약한 조선 출신 선수는 연인원 38명에 이른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한국과 일본이 축구에서 맞붙은 건 1954년에 이르러서였다.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인데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강경 대일외교 정책 때문에 스위스월드컵 극동지역(예전엔 이런 표현을 썼다) 예선의 홈경기를 일본에서 치러야 했다. 앞서 밝힌 대로 1차전에서는 대승을 거뒀고, 2차전은 2-2로 비겼다. 이 경기에 출전하기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유형 대표팀 감독이 한 말은 아직까지도 한-일전을 앞두면 인용되곤 한다. “만약 일본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지금의 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

한국 땅에 일장기 안된다며 원정 홈경기

이 경기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은 주요 대회에서 번번이 마주쳤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은 두 번째로 마주쳤는데 이때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땅에서는 일장기를 절대로 올릴 수 없다며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거부해 홈경기를 또다시 도쿄에서 치렀다. 정정이 불안한 이라크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예선 홈경기를 제3국에서 치르고 있지만 이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홈경기 포기는 코미디 같은 일이다.

당시 예선 1차전에 한국은 일본에 0-2로 지고 2차전에서 2-0으로 이겼다. 그런데 1950~60년대는 국내 대회는 물론 일부 국제대회에서도 오늘날의 연장전이나 승부차기 같은 승패를 가르는 제도 대신 추첨을 했다. 이 무렵 축구 경기를 본 중장년 팬들은 흰 종이에 O 또는 X를 적어놓은 쪽지를 땅바닥에 던진 뒤 각 팀의 주장이 한 장씩 집어드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한국은 추첨에서 져 멜버른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

이후 1960년 로마올림픽 예선, 1962년 칠레월드컵 예선 등에서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64년 도쿄올림픽의 경우 일본은 대회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출전했고 한국은 자유중국(대만), 베트남을 물리치고 본선에 올랐다. 한국은 도쿄올림픽에서 축구사에 남는 대패를 기록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1-6, 브라질에 0-4로 진 데 이어 아랍공화국(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참패했다. 일본은 조별 리그에서 아르헨티나를 3-2로 물리쳤으나 가나에 2-3으로 져 1승1무의 가나에 밀려 8강에 오르지 못했다.

일본이 동메달을 차지한 1968년 멕시코올림픽 예선은 1967년 9월 도쿄에서 치러졌다. 한국은 이 예선에서 일본에 골득실 차에서 뒤져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그때 대표팀 주력 선수인 김호(대전 시티즌 감독)·김정남(울산 현대 감독)·이회택(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등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도쿄발 서울행 비행기에 타야 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일본과 3-3으로 비긴 경기가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 경기 전까지 한국은 일본전 상대전적에서 7승3무3패로 앞서 있었다. 그리고 도쿄 원정에서도 3승1무2패로 우위를 보였다. 경기가 끝나기 직전 터진 김기복의 중거리 슈팅이 일본의 크로스바를 맞고 나왔다. 이 한 방으로 한국 축구는 일본이 ‘탈아시아’를 부르짖으며 으스대는 꼴을 한동안 지켜봐야 했다.

정강지의 연속 골로 2-0 승리하던 날

축구 한-일전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경기가 있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 예선은 서울에서 열렸다. 임국찬의 오스트레일리아전 페널티킥 실축으로 올드 팬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대회다. 이 예선에 나선 일본은 1년여 전에 있었던 멕시코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가마모토 구니시게, 스기야마 류이치, 미야모토 데루키 등을 포함한 호화 멤버로 구성돼 있었다.

한국은 1969년 10월12일 열린 일본과 1차전에서 김기복과 박수일의 골로 2-2로 비겼고, 오스트레일리아전에서는 1-2로 졌다. 그리고 10월18일 벌어진 일본과 2차전에서 정강지의 연속 골에 힘입어 2-0으로 이겨 예선 통과의 불씨를 살렸다. 그날 경기를 보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종로 길을 걸어가면서 “이 경기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필자의 ‘귀 빠진 날’이었다.

축구뿐만이 아니다. 야구 한-일전도 스포츠팬들에게 특별한 추억거리다. 어느 후배 녀석은 1982년 9월14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배, 그때 제가 말년 휴가를 나왔다 귀대하면서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그 경기를 봤거든요. 한대화의 3점 홈런은 정말 짜릿했죠.” 이 친구는 잊어버릴 만하면 회식 자리에서 침을 튀기며 한-일전 야구 얘기를 꺼내곤 했는데, 군대 축구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여자 후배들도 그나마 들어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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