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친구여,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등록 2007-12-21 00:00 수정 2020-05-03 04:25

수비수 홍명보·공격수 황선홍 진한 우정의 역사, 지도자로서의 후반전도 기대돼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그날을 기억한다. 2002년 11월20일. 한국과 브라질의 A매치가 열렸지만, 많은 축구팬들에겐 한 이별이 더 가슴 깊게 남은 그날. “이젠 20번이 달린 태극마크를 입고 뛸 수 없게 됐지만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은퇴하게….” 홍명보(39)는 호흡을 가다듬느라 애쓰는 듯 보였다.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느라 눈빛도 잠시 흔들렸는데, 그건 다소 낯선 모습이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 후 껴안으며 웃어

‘홍명보가 웃었습니다’란 광고 카피가 나올 만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그랬다. 그것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은 충분히 참기 힘들었는데 홍명보와 같이 황선홍(39)이 큰절을 할 땐 팬들은 더 이상 눈물을 감춰둘 힘을 잃은 듯했다. 갖가지 비난을 받는 게 스트라이커의 숙명이라지만,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황선홍을 향한 화살은 가혹할 정도였다.

[%%IMAGE4%%]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그 모든 목소리를 비로소 잠재운 그가 오히려 “한국 축구로부터 받은 혜택을 꼭 되돌려드리겠다”며 몸을 숙이고 있으니 팬들로선 미안하고도 고마운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팀 주치의가 “황선홍은 한국 축구를 위해 워낙 혹사를 당해 어디 한 군데 때문에 은퇴했다고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 말을 떠올린다면, “한-일 월드컵은 나에겐 너무 중요한 역사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국가대표 14년간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빈손이었을 것”이라는 황선홍의 말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후배들 목에 올라타 운동장을 돌던 홍명보는 ‘자신에게 가장 잔인한 고문’ 중 하나로 꼽았던 그 웃음을 옆에 있는 황선홍 못지않게 지어 보였다. 그건 한-일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홍명보가 마지막 골을 넣은 뒤 자신을 향해 뛰어온 친구 황선홍과 껴안으며 보여준 웃음이기도 했는데, 그 웃음에선 오래된 친구와 있을 때 저절로 나오는 편안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후배들의 헹가래 속에 같은 날 최종 수비수와 최전방 공격수는 그렇게 ‘국가대표’란 호칭을 지웠다. 물론 리더십 강한 수비수가 또 나올까, 골문 앞에서 유연하면서도 힘있는 슛을 지닌 공격수를 언제쯤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팬들의 어쩔 수 없는 아쉬움까지 지우진 못했지만.

둘은 1990년 대표팀에서 처음 만났다. 1988년 한-일전에서 데뷔골을 넣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황선홍보다 조금 늦게 홍명보가 대표팀에 들어왔다. 왼쪽 날개로 축구를 시작한 홍명보는 미드필더로 보직을 바꾸며 조금씩 내려왔고, 대표팀에 와서야 수비수로 전향했다.

포항으로 일본으로 동행한 축구인생

이후 수비수 홍명보는 뒤에서 밀고, 공격수 황선홍은 앞에서 끌며, 둘은 운명처럼 축구 인생을 동행했다. 축구선수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는 K리그 신인 드래프트 제도를 똑같이 거부했고, 상무(홍명보)와 독일 2부리그(황선홍)를 거쳐 입은 프로 유니폼도 포항으로 같았다. 홍명보가 먼저 일본 프로축구로 떠나더니, 황선홍이 뒤를 따랐다. 홍명보가 J리그에서 외국인 최초로 주장을 달았고, 황선홍은 한국인 최초로 J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친구가 일본 땅에서 세운 남다른 기록에 또 하나의 기록을 얹었다. 지금은 등번호 20번이 홍명보의 상징이 됐지만, 대학교 때까지 홍명보가 달았던 등번호는 황선홍의 상징인 18번이었다. (홍명보가 처음 대표팀에 뽑힌 뒤 선배들이 다 고르고 남은 번호가 20번이었다. 대표팀에서 인기가 없던 번호였는데, 이젠 팬들뿐 아니라 홍명보도 목욕탕에 가면 20번 옷장을 고를 만큼 의미 있는 숫자가 됐다.)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때론 희비가 엇갈렸다. 황선홍은 ‘똥볼’이란 오명을 뒤집어쓴 19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한때 연락도 끊고 지냈다”고 기억할 만큼 아픔을 겪었지만, 홍명보는 그 대회에서 수비수인데도 2골(1도움)을 넣으며 스타로 발돋움했다. 물론 홍명보는 대표팀에서 같은 방을 써야 했던 황선홍을 보며 “너무나 미안했다”며 친구의 아픔을 자신의 기쁨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도 부상으로 뛰지 못한 황선홍이 한-일 월드컵 1차전 폴란드전에서 골을 넣으며 불운을 떨치는 것을 보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친구가 웃음을 되찾은 바로 이 경기를 홍명보는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경기로 꼽는다.

‘영원한 친구’라는 그들이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지도자로 돌아와 시험대에 오른 것도 흥미롭다. 세대교체 중인 한국 축구가 여전히 홍명보의 수비와 황선홍의 공격을 그리워하는 요즘, 그들은 또 다른 홍명보와 황선홍을 키워내야 할 중책을 안고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코칭 스태프로 동시에 물망에 올랐던 두 사람은 홍명보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한발 앞서는 듯했지만, 전남 코치와 영국 연수를 거친 황선홍이 최근 부산 아이파크 사령탑에 오르며 감독직을 먼저 꿰찼다. 그들은 ‘라이벌’이란 말을 싫어하지만, 누가 지도자로서 성과를 더 낼 것이냐를 놓고 공개적인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말았다.

올림픽팀 코치인 홍명보는 “23살 이하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것이 보람된다”고 했다. 그는 “과거 히딩크가 그랬듯 패스를 통해 경기를 지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수비를 할 때 무조건 걷어내선 안 된다. 바로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우리 동료에게 생각하고 차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선수 생활을 마친 지 4년 만에 감독으로 초고속 승진한 황선홍은 “빠르고 패기 있고 도전적인 팀, 포기하지 않는 팀을 만들고 싶다. 내가 공격수였던 만큼 공격적인 팀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지도자 길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홍명보 코치에겐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의 메달 획득이라는 목표가 있고, 황선홍 감독에겐 K리그 하위권으로 처진 팀을 최소한 중위권으로 올려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그들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의 싫은 소리라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홍명보는 “홍명보니까, 홍명보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일,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황선홍도 “나와 명보한테 뭔가 특별한 걸 기대한다. 그게 부담이 될 때가 있다”고 했다. 자칫 자신들이 쌓아온 아성이 무너지고 흠이 날까 조심스러워하고 조바심을 낸다면 그들의 도전은 새바람을 몰고 오기보단 관행을 답습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그들의 성향은 이해하지만, 때론 정체된 축구계의 변화를 위해 쓴소리도 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각오다. “배가 항구 한곳에만 머물러 있어서야 되겠는가. 배는 거친 파도에 나가서 움직여야 한다”는 홍명보의 말과 “실패를 걱정하는 바보는 되지 않겠다”는 황선홍의 얘기는 진한 우정과 경쟁 그 어디쯤에 놓인 두 친구의 축구 후반전을 자못 기대하게 만든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