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에선 메달이 왔다갔다, 프로 스포츠에선 욕망 뒤엉켜 횡행하는 ‘금지약물 복용’
▣ 신명철 편집위원
1988년 서울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던 9월 어느 날 유도 경기가 열리고 있는 장충체육관 기자석으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 부장인데. 혹시 유도 쪽에서 약물 문제 터진 것 있어?” “없는데요.” “그래. 그런데 거기서 신라호텔이 가깝지.” “예, 바로 옆입니다.” “그럼 말이야 네가 가든지 누구 보내든지, 어서 신라호텔로 가봐. 약물 문제인지, 아무튼 뭔가 터진 것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메인프레스센터에 있는 부장에게서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이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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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적발 사례가 보고됐을 정도로 운동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 프로야구 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 실태를 폭로한 ‘미첼보고서’에서 금지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지목된 메이저리그 뉴욕 앙키스의 로저 클레멘스 선수가 역투하는 모습. (사진/ REUTERS. SHANNON STAPLETON)
얼떨결에 전화를 끊고 보니 그날 열린 체급의 결승이 막 시작되려고 했다. 그날 65kg급의 이경근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금메달을 땄다. 경기 진행 시간으로 봤을 때 오후 9시쯤이었을 것이다. 취재 보조를 하기 위해 따라온 후배 기자에게 일단 신라호텔로 가보라고 했지만 전화의 내용이 워낙 두루뭉술했다. 현장으로 달려간 후배 기자에게서 첫 번째 보고가 있었다. “선배, 기자 몇 명이 있기는 한데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뒤에 밝혀졌지만 그 시간까지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언론사는 ㅈ일보가 유일했다.
서울올림픽을 뒤흔든 ‘벤 존슨 사건’
그 시간 신라호텔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의무분과위원회가 극비리에 열리고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충격에 몰아넣은 벤 존슨(캐나다)의 금지약물 복용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였다. 캐나다 선수단 관계자가 회의에 불려갔지만 이를 아는 기자는 내외신을 막론하고 ㅈ일보 기자를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벤 존슨은 9월24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육상 남자 100m에서 9초79의 놀라운 기록으로 9초92를 찍은 칼 루이스(미국)를 제치고 1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벤 존슨의 금메달은 불과 이틀 뒤 허공으로 날아갔다. 벤 존슨은 금지약물인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혐의로 메달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2년간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 벤 존슨 사건은 운동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 문제와 관련해 국내 스포츠팬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벤 존슨 사건은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운동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최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는 배리 본즈와 로저 클레멘스 등 전·현직 유명 선수들이 무더기로 금지약물을 복용해왔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메이저리거는 물론 운동선수들의 금지약물 복용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올림픽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미 1950년대에 금지약물 복용 사례가 보고돼 있다. 195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제6회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의 탈의실에서 약품 이름을 알 수 없는 빈 앰풀과 주사기가 발견됐다.
겨울철 종목에서는 2006년 벌어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오스트리아 스키 선수단의 무더기 징계가 충격을 던졌다. 당시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제보를 받은 이탈리아 경찰은 오스트리아의 크로스컨트리, 바이애슬론 선수들이 묵은 민박집을 급습해 100여 개의 주사기와 약물 꾸러미, 수혈 기구 등을 찾아냈다. 검사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지만 IOC는 혈액도핑을 시도한 정황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올해 열린 집행위원회에서 해당 선수 6명에게 영구 제명의 중징계를 내렸다. 자신의 피를 뽑아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수혈하는 혈액도핑은 약물을 복용하거나 주사하지는 않지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운동 능력을 강화하기 때문에 이같은 무거운 징계를 받은 것이다.
단속 전날 “나, 단속하러 간다”
운동 능력 향상을 위해 선수들은 약물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특히 프로 선수들의 경우는 이번에 밝혀진 메이저리그 금지약물 복용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지 미첼 전 민주당 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미첼위원회가 최근 내놓은 ‘미첼보고서’에 따르면 메이저리그에서 금지약물 복용이 광범위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데는 선수 본인은 물론 각 구단과 메이저리그 사무국, 선수노조의 감싸기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선수들의 운동 능력 향상이 어떤 형태로든 메이저리그에 도움이 된다는 매우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금지약물 복용 검사 일시와 검사 대상 선수는 시행 전까지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올해 국내 프로야구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한 금지약물 복용 검사도 그렇게 했다. 기습적으로 무작위로 해야 ‘범법자’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서 금지약물 복용이 횡행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는 웃지 못할 이유도 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검사 하루나 이틀 전에 선수들의 소변을 채취하러 오는 검사관들에게서 사실상 통보를 받는다고 한다. 검사원들이 경기장 주차장의 주차증 발급을 요구하는 전화를 구단 사무국에 하기 때문이다. 불법영업 행위를 하는 업체를 단속하러 나가는 일정을 미리 알려주는 것보다는 우회적이지만 “나, 단속하러 간다”고 통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스포츠계는 메이저리그에 앞서 여자 육상선수 매리언 존스가 금지약물 복용으로 올림픽 메달을 모두 박탈당해 체면을 구길 대로 구겼다. IOC는 최근 매리언 존스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딴 메달 5개를 모두 박탈하고 모든 기록도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매리언 존스는 시드니올림픽 육상 여자 100m와 200m 그리고 1600m 계주에서 금메달, 멀리뛰기와 4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한 대회에서 메달 5개를 목에 건 여자 육상선수가 됐다. 그러나 당시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최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과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에서 기록 삭제와 함께 2년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 벤 존슨보다는 늦게 메달을 날렸지만 금지약물을 복용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이번 매리언 존스 사례는 말해준다.
소변 채취 위해 콜라마시는 고통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금지약물 복용 검사지만 선수들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다. 김미정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여자유도 72kg급 결승에서 일본의 다나베 요코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자유도는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이 된데다 다나베는 일본이 꼽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기에 한국 선수단은 김미정의 금메달에 환호했다.
한국 취재진은 경기 기사는 물론 김미정의 우승 소감까지 송고하고 기자촌으로 가는 마지막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갔다. 경기가 끝난 지 1시간 정도 지난 때였다.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 설치된 간이의자에 한국 유도대표팀 관계자들이 왠지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기자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여러분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 선수촌으로 가지 않고 계세요.” “그게 저….” 뭔가 얘기를 하고 싶은데 말하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다른 기자들은 기자촌행 막차를 탔지만 이왕에 늦은 것 비싼 택시비를 지출할 요량으로 관계자들 옆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30여 분이 흘렀을까. 캄캄한 체육관 쪽에서 김미정이 걸어오고 있었다. “잘됐니, 미정아.” “네, 선생님.” “그래, 그럼 가자.” 선수촌으로 가는 막차는 그제야 시동을 걸었다. 김미정은 소변 채취를 위해 콜라를 마셔가며 다나베와 치른 결승전보다 더 힘든 싸움을 1시간 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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