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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베이징을 잡아라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서둘러 감독 정하며 올림픽 준비에 박차를 가한 한국 여자농구

▣ 신명철 편집위원

무자년 새해는 올림픽이 열리는 해로, 국내외 스포츠계의 눈길이 온통 중국 베이징으로 쏠리고 있다. 올림픽 관련 기사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국내의 경우 이른바 4대 구기종목 가운데 축구는 지난해 박성화 감독이 23살 이하 대표팀 사령탑에 올라 1월에 스페인 전지훈련까지 마쳤다. 야구, 남녀 배구, 남자농구가 아직 올림픽 출전을 확정하지 못한 가운데 대한농구협회는 1월23일 올림픽에 출전하는 여자농구 대표팀 지휘봉을 정덕화 삼성생명 감독에게 맡겼다. 여자농구는 2008년 겨울리그가 한창 열리고 있어 오는 4월이 돼야 대표팀을 꾸릴 수 있다. 그런데도 협회가 서둘러 감독을 결정한 이유는 4회 연속 올림픽에 나가는 여자농구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벌써 중국 음식 걱정까지 하는 언론들

국외의 경우 와 등 미국의 일부 언론이 최근 베이징의 대기오염 문제를 다뤘다. 두 신문은 올림픽에 나설 미국 대표팀 선수들과 환경 전문가들의 견해를 동원해 베이징의 오염도가 심각해 선수들이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오염 수치가 개선되지 않으면 경기력은 물론 선수 생명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2시간4분대의 남자 마라톤 역대 1, 2위 기록을 모두 갖고 있는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는 최근 〈로이터TV〉와 한 인터뷰에서 “베이징에 갔을 때 공기 상태가 나쁘면 마라톤 레이스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올림픽사에서 대기오염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68년 멕시코대회, 1984년 로스앤젤레스대회, 1988년 서울대회, 2004년 아테네대회 등은 교통량과 지역적 특성에서 비롯된 대기오염 문제로 대회가 열리기 전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 도시 당국과 대회조직위원회의 특별한 노력으로 큰 문제 없이 대회를 치렀다.

국내외에서 이런저런 보도가 이어지는 것 자체가 6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올림픽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 선수단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금메달 기준 종합 10위 이상의 성적을 기대하고 있다. 올림픽에 나서는 여러 종목 가운데 여자농구는 이번 대회에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다. 정덕화 대표팀 감독의 “4월쯤 정예 멤버를 구성해 올림픽 영광 재현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출사표가 농구계의 희망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김일과 상업은행에 열광하던 시절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여자농구는 한때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종목이었다. 올드팬들은 한국 여성 스포츠를 대표하는 인물로 박신자와 박찬숙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여자농구의 화려했던 시대로 날아가본다.

1966년 김기수가 프로복싱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스포츠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한국은 이듬해인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옛 소련에 이어 준우승하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그 무렵 국내의 인기 스포츠는 프로레슬링과 여자 실업농구였다. 동네 만화가게는 코 묻은 돈을 내고 프로레슬링 중계를 보려는 꼬마들로 북적였다. 프로레슬링과 여자농구 국제대회가 열리는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관중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프로레슬링은 미국과 일본 선수, 여자농구는 일본팀과 자유중국(대만)팀이 출전하는 수준이었지만 당시에는 최고 수준의 국제대회였다. 그래서 김일(작고)과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은 한국 스포츠팬들에게 세계 최고의 선수, 세계 최고의 팀으로 인식됐다.

한국 여자농구가 1960년대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상업은행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상업은행 농구의 중심에는 박신자라는 한국 여자농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가 있다. 숙명여중·고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1학년에 다니다 상업은행에 입단한 박신자는 전정희·박경애 등을 주축으로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여자 실업농구 최강으로 군림하던 한국은행의 아성을 단숨에 깨뜨렸다. 그때는 중앙은행인 한국은행도 스포츠를 장려하고 있었다.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이 박신자를 놓고 벌인 스카우트전은 요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치열했다. 1990년대 서장훈이 연세대로 가느냐 고려대로 가느냐에 따라 ‘4년 농사’가 결정됐던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박신자는 먼저 국내 여자 실업농구를 평정한 뒤, 팀 동료인 김추자·신항대 등과 힘을 모아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박신자는 한국이 준우승했지만 이례적으로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혀 세계적으로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때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한 뒤 서울시청에서 열린 시민 환영행사에 참석한 박신자의 사진은 한국 체육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박신자를 주축으로 한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어 그해 도쿄에서 열린 여름철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출전해 동유럽 국가가 불참한 가운데 가볍게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에 앞서 한국 여자농구는 박신자·나정선·신항대 등으로 짜인 상업은행 단일팀이 1964년 페루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3개 나라 가운데 8위을 차지하며 세계 무대를 노크했다. 야구·배구 등 주요 구기 종목과 육상·수영 등 대부분의 개인 종목이 아시아 무대를 벗어나지 못할 때 여자농구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965년과 1967년 제1회와 2회 아시아여자선수권대회에서 2연속 우승할 때도 박신자 등 상업은행 선수들은 맹활약했다. 여자농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게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니까 1950∼60년대 여자 농구선수들은 한국 스포츠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박신자·박찬숙이 누리던 영광을 다시

1968년 말 박신자·김추자·김명자 등 한국 여자농구를 세계에 알린 주역들이 줄지어 은퇴한 뒤 국내 여자농구는 상업은행과 강부임·홍성화(프로농구 창원LG 현주엽의 어머니)·조복길·박용분 등이 주력인 조흥은행, 그리고 조영순(재일동포)·유쾌선·김영임 등의 제일은행이 치열한 삼파전을 펼쳤다. 한국 여자농구의 전성기였다.

1970년대 한국 여자농구는 박신자에 이어 또 한 명의 슈퍼스타를 낳았다. 서울 숭의여중 3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로 뽑힌 박찬숙은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준우승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으로 한국 여자농구 제2 전성기를 이끌었다. 여자농구는 1980년대에 접어들며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복싱, 남자농구 등에 밀려 옛 영화를 추억하는 종목으로 밀려났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이룬 투혼의 4강은 그래서 여자농구 관계자들에게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제 여자농구는 거함 ‘중공’을 꺾고 여자핸드볼과 함께 구기종목으로는 사상 두 번째로 올림픽 메달을 딴 24년 전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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