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5살2개월로 양궁 국가대표팀 합류해 올림픽 겨누는 곽예지 선수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한 소녀가 있다. 뭔가 물으면 이런 식이다. 얼굴이 먼저 새빨갛게 반응하고, 뜨거워진 볼과 웃음이 새나오는 입을 손으로 가리느라 안절부절못하다가, 그제야 조용조용 대답하는 식. 최근 한 여성이 이 소녀를 찾아왔다. “내가 네 이모야”라고 하더니, 대전으로 가자고 했고, 그곳엔 “내가 네 외할머니야”라는 분도 있었다. 소녀는 사진 한 장을 받았고, 사진엔 유일하게 얼굴을 아는 아빠와 갓난아기, 젊은 여자, 이렇게 세 사람이 서로 떨어져 있으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꼭 붙어 있었다.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할 리 없는 소녀에게 이모와 외할머니란 분들은 “이게 너”라고 일러주었고, “이게 네 엄마”라는 말도 했다. 아빠…. 나…. 그리고 엄마? 그렇게 사진 속 인물을 하나하나 맞춰보니 소녀도 비로소 세 사람의 단란한 풍경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소녀는 아기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단 한 번도 도화지에 그릴 수 없었던 엄마의 얼굴을 지갑 속에 넣어왔다. 외할머니는 그 지갑에 3만원을 찔러줬다.
선배 김수녕의 ‘16살2개월’ 기록 깨
태릉선수촌에 다시 들어왔다. 또, 또, 또 활을 쏜다. 코치가 손에 든 화살로 어깨를 툭 치고 “쭉 펴고…. 어딜 봐?” 하며 자세를 잡아준다. 양궁은 정신이, 마음이 흔들려선 안 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도 소속팀이 어수선해 머리가 복잡하자, 최근 국내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탈락하고 마는 게 양궁이다. 선수촌 양궁장 바로 옆에선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시끄런 공사가 한창이다. 소녀가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일반인들은 끝까지 당기지도 못하는 활시위를 오른쪽 어깨까지 끌어왔다가 툭 놓았는데, 원했던 곳으로 화살이 날아갔나 보다. 또 얼굴이 붉어지며 웃는 걸 보니.
훈련장에 들른 대선배 김수녕(36)씨가 말한다. “자세라든지, 활시위를 놓는 타이밍이라든지 기본기가 좋네요.” 소녀가 뒤돌아보자, 김수녕은 “너 잘한다고”라며 웃어준다. 김수녕은 만 16살2개월 나이에 국가대표가 돼 88 서울올림픽 2관왕에 오른 양궁 스타다. 김수녕이 고등학생으로서 국가대표가 됐을 때도 떠들썩했는데, 지금 그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저 수줍음 많은 소녀 곽예지(대전체중)가 허문 것이다.
1992년 9월생인 예지는 만 15살2개월이던 2007년 11월 국가대표 3차 선발전에서 5위를 차지해 8명을 추린 여자 국가대표에 처음 뽑혔다. 64명 중 32명(1차), 16명(2차), 8명(3차)으로 조금씩 좁혀지는 관문을 계속 통과한 것이다. ‘곽예지’란 어린 선수의 등장으로 2005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이성진은 8명 안에 들지 못했다. 중학생은 대회에서 30m·50m 표적만 쏘는데 예지는 이번 선발전에서 70m를 쏴야 했다. 100m 달리기를 할 때 혹시 숨이 턱턱 막혔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70m나 떨어진 표적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또 마치 ‘점’이 찍혀 있는 듯한 표적 중앙을 노려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지는 12월2일 선수촌에 왔는데, 중학생 양궁선수가 이곳에 발을 디딘 것도 처음이다. 여자와 같이 훈련하는 남자대표팀의 김보람(34)과는 19살 차이다. “선수촌 생활이 재미있고, 밥도 맛있고,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느라 다리가 터질 것 같고, (박)성현(2004 아테네올림픽 개인·단체 금메달) 언니 등과 같이 지내는 게 신기하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말일지 모른다.
“학교에서도 합숙 생활을 하다가 가끔 집에 가니까 아빠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다”며 미소를 짓는 예지는 “할머니가 나에겐 엄마와도 같다”고 했다.
초등 부문 한국 신기록, 슬럼프도 떨쳐
초등학교 4학년 때 양궁을 시작한 예지는 6학년 때 20m에서 720점 만점을 쐈다. 초등 부문 한국 신기록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소년체전을 앞두고 칼에 베여 하필 활을 잡고 버텨야 하는 왼쪽 엄지손가락이 크게 찢어진 뒤 슬럼프가 왔다는데, 2007년 소년체전에서 여중부 50m와 개인종합을 휩쓸며 스스로 슬럼프를 떨쳐버렸다.
예지는 양궁의 매력을 묻자, “화살이 날아가 딱 꽂힐 때 기분이 굉장히 좋다”고 했다. 대전체중 신은주 코치는 “부끄러움도 많지만 경기할 땐 승부욕이 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예지는 태극마크를 달았을 뿐 2008 베이징올림픽 티켓을 쥔 게 아니다. 양궁 여자대표팀은 1월 오스트레일리아 전지훈련 기간 중 자체평가전 등 3월까지 세 차례 평가전을 치러 8명 중 4명을 걸러낸 뒤 그 4명 중에서 또 최종 3명을 선발하게 된다. 올림픽보다 더 치열하다는 국가대표 ‘서바이벌 게임’이 닻을 올린 것이다.
김수녕씨는 “모두 내가 떨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불안감을 갖고 훈련하겠지만, 사실 여기(8명)까지 온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한국 남자양궁은 아직까지 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여자는 88 서울올림픽부터 2004 아테네올림픽까지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놓친 적이 없다. 문형철 여자대표팀 감독은 “여자는 올림픽에서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역적이 된다”고 했다. 실업팀 연봉이 2천만원도 안 되는 선수가 많고, 전체 등록 선수가 일본의 한 도시 선수보다도 적은 게 한국 양궁의 현주소지만, 싸늘했던 관심은 올림픽만 되면 “뭐, 양궁은 우승하겠지”란 기대감으로 부풀려져 선수들을 옥죈다.
“오래 기억되는 선수 되고파”
현재로선 예지에게 양궁 개인 그랜드슬램(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아선수권·아시안게임 우승)을 달성한 박성현(24·전북도청)과 이특영(18·광주체고), 윤옥희(22·예천군청) 등 선배들이 버거운 존재들이다. 그러나 문형철 감독은 “84년 LA올림픽 때 모두들 김진호가 우승한다고 했지만, 서향순이란 선수가 우승했고, 88 서울올림픽 때도 우승 후보로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수녕을 말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양궁 표적은 가운데 10점 만점 노란색부터 빨강, 파랑, 검정, 흰색 순으로 밖으로 나가며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20kg 가까운 무게의 활을 들고 70m 표적 앞에 선 예지에게 ‘네가 꼭 맞히고 싶은 노랑색 10점 만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지는 서슴없이 “아빠, 그리고 할머니가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기다 “오래오래 기억되는 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겨우 15살인 ‘소녀 궁사’의 당찬 도전은 마치 “오빠, 언니들 목표를 세우셨나요? 그럼 표적을 보세요. 너무 멀지 않냐고요? 에이~ 집중 또 집중하셔야죠. 자, 이젠 활시위를 끝까지 당겨보세요. 표적이 조금씩 보이신다고요? 그럼 됐어요. 망설이지 마세요. 손을 놓기만 하면 화살은 그곳으로 쏜살같이 날아갈 테니까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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