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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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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와 아마추어 벽을 넘어, 홈런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2008년 베이징올림픽 예선에 나선 프로야구 선수들, 아마추어리즘 소멸하고 시대는 흐르네

▣ 신명철 편집위원

1982년 3월27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청룡 대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전을 시작으로 이 땅에 본격적인 프로스포츠 시대가 열렸다. 복싱, 레슬링, 골프 등 일부 프로 종목이 있었지만 일정한 틀을 갖춘 리그 형태의 프로스포츠는 이때가 처음이다.

프로가 출범하기 전에도 야구선수들은 한일은행·제일은행·기업은행·상업은행 등 금융권 팀이나 한국전력·포항제철 등 국영기업, 롯데·한국화장품 등 민간 기업에 적을 두고 운동을 했다. 겉으로는 아마추어였지만 실제로는 프로나 다름없었다. 회사 업무는 거의 보지 않고 선수 활동을 하는 것으로 급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어정쩡한 형태의 아마추어 스포츠는 프로야구 출범 뒤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야구단 점퍼가 위화감 조성한다던 시절

하지만 프로스포츠 시대는 열렸어도 프로스포츠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그 무렵 국내의 내로라하는 종합일간지 사회면 톱 기사로 프로야구단 어린이 회원용 점퍼를 입고 오는 어린이가 학교 안에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으니까. 프로스포츠가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표현은 그때까지만 해도 어불성설에 가까웠다. 체육계 관계자는 물론이고 적지 않은 체육기자들이 스포츠는 돈과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아마추어리즘을 따르고 있었다.

1950~60년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을 지낸 에버리 브런디지가 끝끝내 지키려던 아마추어 정신은 대체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을 앞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조직위원회의 피터 위베로스 위원장이 올림픽을 상업적인 측면에서 성공으로 이끈 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된 건 아마추어리즘의 소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옛 소련과 옛 동독 등 사회주의권에서는 1980년대까지 나라가 직접 관여하는 스포츠 체계에서 선수들을 발굴하고 육성했다. 체조 한 종목만 보더라도 베라 차슬라프스카(옛 체코슬로바키아), 올가 코르부트(옛 소련), 나디아 코마네치(루마니아), 넬리 킴(옛 소련) 등 올림픽을 빛낸 수많은 선수들이 ‘국가 아마추어리즘’의 틀 안에서 성장했다. 허울은 아마추어이지만 프로에 못지않은 혜택이 주어졌다.

북한도 예외는 아닌데,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북한 레슬링 선수 김영식을 통해 그 실상을 엿볼 수 있었다. 대회가 막바지로 내리닫고 있던 그해 8월7일 바르셀로나체육대학 레슬링 경기장 앞 잔디밭에 기자들과 오전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선수촌으로 가는 순환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술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웬 술 냄새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북한 선수 몇 명과 코치가 있었다. 오전에 벌어진 레슬링 자유형 57kg급 3위 결정전에서 이긴 김영식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반갑습네다. 앉으시라요.” 북한의 코치가 반갑게 맞았다. “이번 대회에서 북쪽 성적이 비교적 좋네요. 축하합니다. 그런데 웬 술 냄새입니까.” “술 냄새가 납네까. 죄송합네다. 제가 어제 조금 많이 마신 것 같습네다. 죄송합네다.” 코치 옆에 앉아 있던 김영식이 머리를 주억거리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술이 깨지 않을 정도로 마셨다면 꽤 많이 마셨을 텐데.” 이때부터 김영식의 하소연이 시작됐다.

먼저 김영식의 화려한 선수경력을 소개한다. 바르셀로나올림픽 48kg급 금메달리스트인 김일과 함께 1990년대를 전후로 북한 레슬링 자유형의 간판으로 활약한 김영식은 바르셀로나올림픽 전까지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 1위,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2위(이상 52kg급),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 1위(57kg급),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1위(52kg급) 등 52kg급과 57kg급을 오가며 세계무대를 휩쓸었다.

옛 소련에 무너졌던 북한 선수의 꿈

김영식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57kg급으로 출전했다. 김영식으로서는 전성기인 1988년에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 게 무척이나 아쉬웠을 것이다. 국제무대 성적은 화려했지만 올림픽 메달이 없는 김영식은 바르셀로나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금메달을 따고 싶었다. 김영식은 평양을 떠나올 때 애인에게 굳게 약속했단다. “꼭 금메달을 따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김영식의 애인은 평양 시내에 쓸 만한 살림집도 마련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여자 유도의 계순희, 여자 마라톤의 정성옥, 여자 탁구의 리분희 등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후배 선수들보다 먼저 인민체육인이 될 만한 실력을 갖춘 김영식이었다. 김영식의 애인은 김영식이 평양을 떠나올 때 짐꾸러미 깊숙이 뭔가를 집어넣었다. 조금씩 마시고 힘을 내 금메달을 따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뱀술이었다.

대회가 시작됐다. 컨디션도 좋았고 수분조절(체중조절)도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김영식의 금메달 꿈은 조 편성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레슬링 강국인 독립국가연합(EUN·옛 소련) 선수와 한 조가 됐고, 조 1위 결정전에서 그 선수에게 져 3위 결정전으로 밀려났다. 가슴이 터질 노릇이었다. 선수촌에 돌아왔으나 경기 장면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뱀술 한 병을 몽땅 마셔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술 냄새를 풍기며 매트에 올랐다. 상대인 터키 선수는 고약한 술 냄새가 역겨웠는지 슬슬 꽁무니를 빼다 맥없이 무너졌다.

“나이가 꽤 됐지요. 운동을 계속할 건가요.” “이젠 그만둬야겠시요. 평양에 돌아가면 지도원 공부를 할까 합네다.”

병역 혜택 등 보상 없는 경기일지라도

세계 여러 나라가 오는 8월 열리는 베이징올림픽에서 자국 선수들의 경기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각종 ‘당근책’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러시아의 후원 내용이 눈길을 끈다. 옛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스포츠 강국 자리를 지키고 있는 러시아는 금메달 5만달러, 은메달 3만달러, 동메달 2만달러의 포상금을 준다. 또 메달을 따면 스포츠 펀드와 거대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이 제공하는 주택, 자동차 등 50만달러어치의 보너스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재벌기업 총수들이 각 종목 협회나 연맹의 수장을 맡고 있던 1980년대 한국 스포츠의 행태와 비슷하다.

이제 스포츠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벽은 무너졌다.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3월7일부터 14일까지 대만 타이중에서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세계예선이 열렸다. 이 대회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모두 프로선수였다. 본선이 아니기에 좋은 성적을 올려도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 병역 혜택도 없었다. 게다가 시즌에 대비한 시범경기가 한창 열리고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 한때 프로야구 선수들은 “병역 혜택 등 특별한 보상이 없으면 열심히 뛰지 않는 등 국가관이 약하다”거나 “돈만 밝힌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번 올림픽 야구 세계예선은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한 이런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라를 대표해 뛴다면 프로도 아마추어와 다를 게 없다. 나라를 위해 뛸 수 있다는 건 언제 어느 때이건 운동선수들에게는 더없이 명예로운 일이다.

*‘신명철의 스포츠 ON’은 이번호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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