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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붐의 유연해진 ‘1등주의’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직선제 주장에 연령별 주장까지 만들며 선수들에게 귀 여는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지금까지 소주를 한 잔도 마신 적이 없어요.”

1월22일 저녁, 남해 스포츠파크 횟집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차범근(55) 수원 삼성 감독은 이날도 연습경기를 거르지 않았다. 사이다를 부은 그의 소주잔 위로 거품이 뽀르르 올라왔다. “집에 손님이 오면 와인은 조금 마시는데, 다음날 집에 남은 술냄새가 정말 싫어요. 형들은 술을 잘하시는데…. 축구 선배들이 말년에 힘들게 사는 걸 봤죠. 난 술·담배는 멀리하자고 결심했어요. 여자를 만나면 결혼은 빨리 할 생각이었고.” 그는 고려대 2학년 때 만난 연세대 신입생을 “4년간 쫓아다녀 결혼했다”고 표현했다. 애초 소개팅에 나갈 친구가 시골집에 가는 바람에 대타로 나온 단발머리 신입생. 지금의 아내 오은미씨다. 소개팅 다음날 청혼을 했는데, 그는 이걸 ‘태어나 가장 용감한 순간’이라 기억했다. “처가댁이 당연히 반대했죠. 돈 없는 농사꾼 아들이었으니까. 성공하고 싶었어요.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 너무 가난했으니까.”

그는 경기도 화성 태안면 송산리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버스가 끊긴 지점에서 한참 걸어가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는 ‘까치마을’이 고향이다. 일제시대에 서울에서 마차를 끌었던 그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초등학교 육상선수로 대회에 나가 먹었던 비계가 둥둥 뜬 국밥 국물을 잊지 못한다는 그는 경신고 1학년 때 축구대회 직전 영양실조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만 열여덟에 뽑힌 국가대표팀에서 받은 수당으로 물 새는 양철지붕 차양부터 고쳐야 할 만큼 그의 집은 넉넉하지 못했다.

‘까치마을’ 가난한 집 막내가 최고 스타로

그는 성공했다. 한국 축구가 낳은 최고 스타가 됐다. 20세기 세계 축구를 움직인 100인(영국 축구잡지 선정)에도 뽑혔다. 독일 분데스리가 은퇴 당시 외국인 최다 출전(308경기)과 최다 골(98골), 유럽축구연맹(UEFA)컵 두 번 우승의 기록도 썼다. ‘차붐’은 ‘코리아’보다 유명했다. 그는 지금도 독일 시내 벽화에 등장하는 귀빈이다. 축구로 1등을 한 그는 1등 기업 축구단의 감독이다. 그는 선수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 안다. 그건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 그 경험을, 유럽에서 배운 것을 물려주고 싶어한다. 그의 말은 반듯하고 옳다. 그런데 너무 틀린 게 없어서 어떤 선수들은 그걸 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선수들에겐 너무 큰 기대치로 다가갈 때도 있다. 거기에 짓눌려, 또는 못 이겨 스스로 떠난 스타, 떠밀려나간 젊은 선수들이 있다. 그는 “기회를 주며 기다렸다”고 말했는데,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는 예전에 “선수 전체를 다 이해하고 끌고 갈 순 없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잘하는 선수, 한번 해보겠다고 덤비는 선수를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는 선수로 키우는 ‘1등주의’를 겨냥한다. 눈을 부릅뜨고 할 수 없는 선수라면 미안하지만, 버스에 다 태우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야박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1등주의는 모두 1등이 돼라는 강요가 아니다. “훈련장과 경기장에서 열정을 100% 다 쏟아내고 몰입하라”는 얘기다. 자신이 그렇게 했고, 그게 얼마나 큰 효험이 있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이란 책에서 “배고픔에서 꺼내준 축구가 고마웠고, 실력이 모자라 축구가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할까봐 죽어라 연습했고, 이 축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는지 그걸 보여주고 싶어 최선을 다해 선수 생활을 했다”고 떠올렸다.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수만 있다면 피와 땀을 흘리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고 했고 “내 몸이 못 이겨 영양실조로 쓰러질 때까지 훈련했다”고도 했다.

“신영록은 한국 축구에 꼭 필요한 선수”

그는 국내 최정상에 있던 1978년 12월 독일로 떠났다. 혼자였다. 그는 동대문시장에서 산 싸구려 회색 스웨터와 운동화 차림이었다고 기억했다. 그해 박대통령배에 초청된 독일 아마추어팀의 지도자가 테스트를 한번 보라고 부른 것이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최고 리그였다. 다름슈타트에서 이틀간 테스트 겸 훈련을 한 뒤 경기에 바로 출전한 그는 군복무 때문에 귀국한 뒤 1979년 6월 독일로 완전히 건너가 테스트만으로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매니저가 “한국에서도 축구를 하느냐”고 물었다고 하니, 그의 입단은 실력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독일로 가기 전, 또 독일로 간 뒤에도 90분을 똑같은 속도로 빨리 뛰는 개인훈련을 매일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매일 밤 9시면 취침에 들어갔다. 1976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1-4로 지다 경기 막판 7분간 세 골을 몰아넣은 이 ‘불세출의 스타’는 그런 노력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그걸 제자들도 해보라는 것인데, 그들과의 소통에서 가끔 엇박자를 냈다. 그런 그가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주장 지명제를 접고, 선수들의 투표를 통해 송종국을 주장으로 뽑았다. 이른바 첫 ‘직선제 주장’이다. 여기에 곽희주(81년생)는 중간급 선수, 하태균(87년생)은 어린 선수들을 대변하는 연령별 주장에 앉혔다. 차 감독이 처음 실시한 연령별 주장들은 자신의 나이대 선수들의 기탄 없는 의견을 송종국을 거쳐 감독에게 전한다. 차 감독은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고, 항상 대화할 수 있는 언로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남해에서 수원 선수들을 여럿 만났는데, 모두 “예년과 다르게 선수단 분위기가 활발해졌다”고 했다.

차 감독의 이런 조처는 최근 수원을 떠나려고 한 올림픽대표 신영록(21)이란 어린 선수 덕이 크다. “한국 축구에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선수다. 골문 앞 감각은 한국 선수 누구도 못 따라간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나이엔 그런 감각을 갖지 못했다. 정말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오래 곁에 두고 키워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좀 거꾸로 가더라. 내 마음이 잘 전달 안 된 것도 있어 부모님을 만나 설명했다. 내 손에서 잘못 관리한 것도 있었고, 선수가 내 생각을 잘못 이해한 것도 있었다. (차)두리 동생인 우리 막내아들 (차)세찌와 영록이가 동갑이다. 세찌가 최근 팔과 손을 다쳐 여러 번 수술을 받으며 속을 썩였는데, 영록이를 보면서 막내아들 생각도 나더라.”

우승에 목마른 팀에 변화 가져올까

‘차붐의 1등주의’가 귀를 열었다. 안정환(부산 아이파크)·김남일(비셀 고베) 등 대형 스타들이 떠난 수원은 올해 젊은 선수들이 팀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들이 얼마나 창의적인 축구를 하느냐는 수원으로선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들과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한 차 감독의 실험은 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3년간 트로피를 놓친 수원은 지금 우승에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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