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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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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걷는 거지?

등록 2004-10-28 00:00 수정 2020-05-03 04:23

[겸이 만난 세상]

▣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걷는 이유를 몰랐다. 내가 왜 무엇을 위해 걷고 있는 건지, 목표도 목적지도 없는 이 여행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한순간에 결정됐다. 난 무엇을 해야 할지 살아가야 할 목적을 상실한 나날을 보냈다. 확실히 난 모든 면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전히 궁핍하지만 신경질적인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고, 이젠 그 무엇도 날 흔들어놓지 못할 것 같았다. 가진 것이 없어 잃어버릴 것조차 없었던, 세상에 대해 알지 못했던 때 두려움이란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도처에서 날 유혹했지만 온몸이 멍든 채 살아도 생의 목적에 대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안정과 평화를 얻을수록 두려움과 불안감 또한 배가되고 있었다. 무슨 일에 앞서 어떻게 해야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지, 가까스로 손에 거머쥔 나의 평화들이 사라지진 않을까 손익을 따지고 계산을 먼저 하며 잃을 것이 두려워 떨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슬펐다. 마치 내가 얼마나 성장했고 평화로운지 과시하듯 사람들 앞에서 다른 나를 연기했다. 밤마다 참을 수 없는 서글픔에 울었다. 그럴 때마다 하루를 위로해줄 섹스 파트너나 찾고 있는 모습이, 죄의식에 짓눌려 믿지도 않는 기독교의 찬송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담당 정신과 주치의에게나 나약함을 드러내야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난 흔들리고 있었다. 무척 지쳐 있었고 매번 이러는 자신이 지겨웠다. 그리고 지금 서 있는 위치를 되뇌었다. 이건 평화가 아니다, 그건 내가 아니다, 이곳은 아니다, 이곳을 떠나야지, 도망쳐야지.

곧바로 난 고시원을 나와 부산에 와서 도보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 여행은 여행이 아니었다. 배가 불러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나 촌스럽게 경치나 구경하고 음식이나 먹으러 여행을 떠나지 하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굳이 도보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머물 곳이 없어 걷기 시작했고, 노잣돈이 없어 자연스레 무전여행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부산에서 출발해 진해, 창원, 마산, 함안을 거쳐 진주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사람들 인심이 각박해 어딜 가든 잠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곤 아직까지 힘들진 않다. 생각해보면 사는 게 힘들지 이렇게 하염없이 걷는 일은 누구의 간섭도 없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고시원에 처박히다시피 살다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이다지 푸른가 싶을 정도로 마음은 가볍다. 단지 사람이 그립고, 내가 왜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 외에는.

걷는 내내 내가 왜 걷고 있는지 자문해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애당초 답을 구하러 떠난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답이 존재할 리 없을 수도 있다. 제아무리 삶의 목적 뚜렷해도 살아갈수록 생의 불가해한 모습만을 발견하는 것처럼, 답을 찾았다고 외칠 때 언제나 그렇듯 삶은 침묵하는 것처럼 난 이 여행의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것은 길을 잃어버리려 시작된 여행이다. ‘왜 걷지?’란 질문을 의미 없게 만들기 위해, 이미 정해진 답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떠난 길이다. 끝을 예측할 수 없는 여행에서 돌아올 쯤엔 짐을 꾸릴 때처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하나의 불귀점이 되길 바라며 떠난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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