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 만난 세상]
▣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게다 안다의 모차르트 연주를 들으며 그 곡을 가장 좋아한다던 한 소녀와, 내게 메일을 보냈던 외로운 10대 소녀들을 위해 글을 쓴다. 처음 내게 메일을 보낼 때부터 나와 결혼할 마음으로 글을 썼다던 14살의 어린 소녀는 시인 김종삼을 보헤미안 생존자인 동시에 무시민주의자라고 평한 황동규의 말마따나 자신 또한 무시민주의자라 했다. 국어 문제집을 모조리 펼쳐놓고 정답을 고르기 위해 정답만큼이나 매력적인 오답을 걸러내본다는 소녀는 만나달라고, 자길 사랑하냐고, 누구보다 맛있게 가자미 구이를 해주겠으니 자기와 결혼해달라고 했고, 난 ‘만날 순 있지만 당신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냉랭한 답으로 일관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날 죽여도 세상 사람들은 무죄라 할 것이라며 분노 섞인 욕을 퍼붓고 다신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정작 마음이 아픈 것은 내 자신이 아닌 그 소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만난 누구보다 총명했으며,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총명함으로 인해 그만큼 미쳐 있었다. 14살 때의 난, 세상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며 홀로 골방에 갇혀 일기를 써댔지. LP판 모차르트를 듣지 않았고, 김종삼이 누군지도 몰랐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절망과 손을 잡았습니다’와 같은 표현능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난 그녀가 사무치게 안쓰러웠고, 어른도 아니면서 그녀 앞에서 어른인 체하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세상이 원하지 않는 성장 속도로 성숙한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렇듯, 이 지면을 통해 메일을 보낸 또래들은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늘 자신이 외계에서 유배된 이방인이라 생각하며 10대를 보내고 있었다. 지나치게 아픈 모습만 드러냈던, 이제 10대를 끝마친 나를 보며 자신과 같은 종족이라 생각하고 메일을 보낸 그 아이들은 너무도 외로워 보였다. 고독에 에워싸인 그들은 세상을 무대로 연기를 했다. 세상이란 무대는 언제나 실제 상황이므로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고, 실수를 저질러 사람들에게 지적을 받을 때면 자신의 연기 부족 탓이라 여기고 또 다른 역을 찾아 살아간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진심을 드러낼 때엔 상처를 받기 때문에 자신을 숨긴 채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누군가를 연기한다. 자아의 부재는 쉽사리 죽음의 유혹을 받는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의 10대는 생명력 넘치는 쾌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이 사악한 도시를 살아가는 10대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죽음과 가깝다.
하지만 난 안다. 당신들이 보내는 10대는 그 시기를 보낸 사람들이 추억하는 멜랑콜리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고 현실과 현재를 고민하는 가장 치열한 때임을.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자살은 극단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변화를 두려워하는 극우적 개인주의이니 죽지 말고 살아 다 같이 부도덕한 도시를 좋은 마을로 만들어보자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우리의 희망을 찾아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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