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이 만난 세상]
▣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점퍼를 끌어당기며 온몸이 움츠려드는 겨울은 새로운 가족을 찾아야 하는 계절이다. 겨울이면 난 배를 곯며 집이 없어 벌레, 나비, 파리처럼 떠돌아다녔다. 그런 내게도 드디어 새로운 가족이 찾아온 듯했다. 메일을 통해 알게 된 한 친구와 강원도 어느 외진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몽상가로 살아가는 분의 집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어릴 적부터 곧잘 그림을 그리곤 했던 난 여전히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두명의 식구와 함께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날 당장 짐을 싸서 강원도로 향했다.
간간히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던 친구와 달리 초면인 선생님을 뵙기가 두렵고 어색했기에 선물로 부침개를 준비해갔다. 첫날 밤에 크게 차려진 상에 술을 마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고졸에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왠지 나 또한 그들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을 존재라 느껴졌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 그곳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었다. 몸을 청결히 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 매일 아침 짧은 등산을 하고, 하루 세끼를 먹고, 옷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광목(면) 빨래와 가사를 제자들이 분배해 하는 것. 지난 도보 여행에서부터 반떠돌이 생활로 전전하며 아래 위 옷 한벌로 이어왔던 누추한 차림새를 벗겨내고, 하루 한갑씩 피워대던 담배도 두어 개비로 줄이고, 한끼 식사로 하루를 버텨왔던 식생활을 하루 세끼로 늘리고, 불면으로 주침야활을 지켜왔던 활동 시간을 바꿔 아침 8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이 들었다. 유머가 넘치는 선생님과 나를 잘 이해해주는 친구와 함께라면 그럴듯한 가족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늘상 그랬듯, 문제는 내부의 경계에서 불거져나왔다.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퀴어’로 살아가는 내게 “여자랑 결혼하려면 이런 것쯤은 해야지”라는 단정과 부엌일을 가장 즐거워하는 내게 “남자가 이 정도의 힘도 쓰지 못하나” 하는 젠더 구분, “술 따르는데 두 손으로 받으면 되나” 하는 나이주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선 조건과는 달리 위의 것들은 내가 살아오며 존재의 위협을 느껴왔기에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대화를 통해 그것들을 수정해주길 요구했으나, 나 같은 사람은 너무 특별해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지금 자신에겐 그런 여유가 없으니 자신의 식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 했다. 나 또한 자아를 포기하고 그곳에서 살 순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새벽, 난 강원도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나의 경계는 뚜렷하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될 순 없다. 오히려 난 자신이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 느끼며 살아간다. 나에 대한 배려는 받아들이기에 따라 어느 누구나 가진 상처를 배려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나의 경계는 황량한 세상에 세 들어 사는 내 삶의 부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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