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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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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지옥?

등록 2004-12-03 00:00 수정 2020-05-03 04:23

[겸이 만난 세상]

▣ 겸/ 탈학교생 queer_kid@hanmail.net

내 태생의 저주는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가족은 사랑이 없었고 학교는 따뜻하지 않았고 사회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했다. 난 그저 튀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길 바랐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10대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연기를 펼쳤다. 남들 앞에 우리 가족은 평범한 가정으로 그려졌고 학교생활에서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세상은 내게 거짓말을 가르쳤다. 어렸기에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내가 내뱉는 말들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거짓말을 가르친 가족과 학교, 세상을 불신했다.

동시에 난 모든 것을 의심했다. 중학교 때 도덕 교과서에 나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의심했다. 사람들이 뻔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이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단이 선동하는 구호를 믿는 자는 덫에 갇힌 쥐새끼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생각을 강요당했다. 또 나는 너나 할 것 없이 떠드는 행복의 가치를 믿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에 가치를 부여했다. 고통만이 ‘지금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며 성찰의 길로 이끌어주는 선도사의 역할을 하므로. 난 애정이 있기 때문에 매를 든다는 교사를 믿지 않았고, 앵무새마냥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진보주의자를 믿지 않았고, 게이를 찬양하는 페미니스트를 믿지 않았고, 행동 없이 책상 위에서 궁싯거리는 혁명가를 믿지 않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거대담론만 떠들어대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또 자신에 대해 여지없이 잘 안다고 말하는 이들 역시 믿지 않았다.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자는 자신 또한 의심하고 불신하기 마련이다. 시내 곳곳에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외치는 신도들의 편집증적인 복음주의에서 배울 점은 없을 듯하지만, 그들 곁을 지날 때마다 그래도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부러웠다.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메마른 마음에 구원의 불을 지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한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반면 불신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왜곡된 거울로 둘러싸인 독방에 갇혀 불쾌한 나르시시즘을 발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신도들의 사랑이 독방에서의 나르시시즘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으나, 구원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신을 깨우쳐줄 경구이다.

사람을 불신하고 거짓을 토하는 내게 구원은 나를 찾는 일이다. 구원은 하늘나라에 있지 않다. 높은 곳에 있는 자는 땅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나의 구원은 지옥에 있다. 불신으로 인간임을 박탈당했을 때 구원을, 혁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평생의 소원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나를 찾고, 우리를 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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