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쩌다 틀어졌을까, 우리의 슬픈 대화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노·사·정 회의에 참석한 이수호 최고위원…
“지금과 비교해보면 메아리 없던 그때가 호사였는지도”
등록 2010-05-21 18:22 수정 2020-05-03 04:26
노·사·정 대화의 새 틀을 짜려 했던 참여정부는 노동계와의 골이 깊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4월5일 열린 노·사·정 대표자회의. 맨 왼쪽이 이수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노·사·정 대화의 새 틀을 짜려 했던 참여정부는 노동계와의 골이 깊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2005년 4월5일 열린 노·사·정 대표자회의. 맨 왼쪽이 이수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1989년의 봄도 올해처럼 어수선했다. 전교조 결성을 추진하던 몇몇 선생님과 함께 당시 국회의원회관(지금의 한국방송 연구동)의 노무현 의원 방을 찾았을 때도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다.

“교원의 노동3권을 전면 부인하는 현행 법률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들이 스스로 단결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이것은 변호사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저의 소신입니다.”

전조교에 큰 힘이 된 국회의원 노무현

노무현 의원은 단호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어 보였다. 당시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으로 조직 형태를 바꾸기로 결정하고 추진하던 우리에게는 천군만마의 큰 힘이었다. 하지만 이내 일침이 날아왔다.

“그런데 각오는 돼 있는 거죠? 현 정권의 태도로 봐서 당연히 불법으로 몰아가겠지요? 몇 명 정도 잘릴 각오십니까?”

우리는 당황했다. 주저주저했다. 민주화시대를 맞아 옳고 정당한 일을 하는데 목이 잘려야 한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전교협의 사무처장으로 노동조합 추진 실무 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크게 용기를 내어 대답했다.

“중앙간부 몇 명과 지역책임자 해서 한 20여 명 잘리면 되지 않을까요?”

노무현 의원은 입가에 알 수 없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조용히 대답했다.

“선생님들이 지금부터 하시려는 일은 지금까지 해온 따뜻한 봄날 같은 ‘교육운동’이 아니라 추운 겨울의 얼음판 같은 ‘노동운동’입니다. 전태일 분신 이후 처절하게 계속되고 있는 그 고난의 행렬에 동참하는 겁니다. 20여 명? 그 정도는 결성 순간 감옥으로 가야 할 겁니다. 한 200여 명은 해고될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노무현 의원의 예언은 절반만 맞았다. 실제 그해 5월28일 우리는 전교조의 깃발을 올렸고, 지부장과 중앙간부들이 바로 구속됐다. 그런데 해고는 달랐다. 우리는 스스로 명단을 공개했고, 그게 근거가 되어 형식적이라도 탈퇴를 하지 않은 1540여 명이 그해 여름 일시에 목이 잘렸다. 그해 사립학교 등까지 모두 2천 명 넘게 해고됐다. 노무현 의원이 한 예언의 10배였다.

요즘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이 불법으로 명단을 공개한 이후 보수 언론과 우익 단체들에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 정작 학교 현장에서는 명단 공개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전교조 조합원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결성 초기 심한 탄압을 받을 때는 교육부나 교육청이 마련한 ‘전교조 교사 식별 지침’까지 나돌아다녔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개량 한복을 즐겨 입거나 풍물 등 우리의 것을 가르치는 교사, 아이들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 교사, 토론 수업 등 수업을 열심히 하는 교사, 아이들을 차별하지 않는 교사, 수업 시간에 시사 문제나 다른 얘기를 많이 하는 교사, 수업에 다른 자료를 많이 사용하는 교사 등등.’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그 기준에 맞게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위원장님, 저 많이 달라졌습니다”

노무현 의원이 대통령이 됐을 때, 속으로 울었다. 청문회 스타 시절, 재벌 대표 정주영 회장을 국회 증언대에 세워놓고 노동운동 탄압 사례를 일일이 들며 눈물을 훔치며 야단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젠 우리 노동자도 제대로 대접받는 시대가 열리는구나’ 했다.

실제 참여정부는 새로운 틀인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만들어 노·사·정 대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기도 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틀어졌는지, 꺼내는 기억마다 회한은 짙다.

민주노총 위원장 자격으로 청와대의 초청을 받았다. 과거 국회의원이나 변호사 시절의 좋았던 기억을 애써 먼저 꺼내는 내게 돌아온 한마디는 찼다.

“이 위원장님, 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 운동권 시절이나 국회의원 노무현이 아닙니다. 막상 대통령이 돼보니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는 내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노-정 관계가 아직 상당히 적대적인데다, 더욱이 민주노총이 취해온 원칙적이고 강경한 입장은 여전한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 사이에 어려운 문제를 부드럽게 잘 풀어보라는 좋은 뜻으로 이해야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관 주도와 조급증이 문제였다. 조그만 일도 정부의 성과로 포장하려 한다거나, 어려운 대화를 시작한 지 채 몇 달이 되지도 않았는데 결과를 기대한다거나, 심지어 미리 준비해놓은 결과에 꿰맞추려 하는 등의 행태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몇몇 임단협 노사관계에서 심각한 갈등이 조성되고, 레미콘회사 노조의 투쟁을 지원하다가 레미콘 차량에 깔려 숨진 한국노총 김태환 열사의 죽음을 둘러싼 노동부와의 감정 문제 등을 헤쳐나가지 못하며 골은 깊어졌다. 급기야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양 노총 위원장이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단식농성에 들어가며 노동부 장관 퇴진 투쟁까지 벌이게 됐으니, 노무현 정부 출발 때의 분위기와는 아주 딴판이 돼버린 것이다.

골이 생길 때마다 나는 간곡히 청와대를 향해 직간접적 신호를 보냈다. 부디 너무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을 제발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나라의 예를 보더라도 대화의 틀 하나 만드는 데 최소 몇 년씩은 걸리지 않느냐? 메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조차 호사였는지 모르겠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노골적으로 민주노조를 말살시켜 노조운동의 숨통을 끊으려 하는 이명박 시대와 비교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 들어 나는 지난해 용산 참사 기자회견 등으로 세 번이나 붙잡혀 48시간씩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풀려나곤 했다. 명색이 정당의 최고위원도 그런데, 보통 시민은 어쩔까 생각했다. 서울시청 부근에서 촛불 비슷한 걸 들기만 해도 잡아가는 세상이 됐다. 합법 파업이 명백한데도 철도 노동자 수만 명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 공무원노조나 전교조는 단지 공무원이기에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백 명이 기소됐다. 맥없이 정권을 넘겨준 후과다.

순수한 용기는 모든 비판 뛰어넘어

지난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당혹스러우면서 한편으로 화가 났다. 솔직히 이명박 정권과 더 처절하게 싸워주었으면 했다. 그것이 정권을 이명박에게 넘겨준 데 대한 자기성찰과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무릎을 꿇는 건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의 순수한 용기는 그 모든 것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래서 아픈 날, 나는 ‘봉하 마을 바보새’라는 시를 썼다.

바보짓도 제대로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고/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겁과 비굴도/ 마음이 실리면/ 용기다// 항복도 때가 맞으면/ 아름다운 저항이다// 비로소 두꺼비는/ 독사의 아가리에 몸을 던져/ 죽음의 독을 뿜고/ 새끼를 키운다// 아/ 두 눈 껌벅이며/ 부엉이 운다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