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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 가슴만 아프십니까

등록 2008-06-13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박경석 한겨레21인권위원·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
[인권 OTL-숨은 인권 찾기⑥]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장애인들은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가슴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애로 태어난 것도 자기의 운명입니다. …자기의 부주의로 장애가 된 것을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친 요구이자 국민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강원 원주시 김기열 시장이 시 공무원들에게 훈시한 말 가운데 일부이다. 당시는 원주의 중증장애인들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 활동보조인 서비스 생활시간 보장, 장애인 가족 지원 정책 마련 등을 요구하며 시청 앞에서 한 달 이상 노숙농성을 하던 때였다. 김 시장의 말은 사실상 장애인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기 운명이다? 맞다고 치자.
그러나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로 인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장애인을 배제하는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차별과 배제가 가속화되는 것이며 그리하여 장애는 비참한 그 무엇이 된다. 장애인 차별은 정확하게 사회적 책임의 문제인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타고 다니는 대중교통인 지하철과 버스를 자유롭게 타기 위해 중증장애인들은 온몸에 쇠사슬을 묶고 목숨을 걸고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며 이동권 보장 투쟁을 해야 했다. 그 결과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만들어졌고 장애인의 이동권이 권리로 명시됐다.
김기열 시장은 ‘권리’가 무슨 뜻인지 모른단 말인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라. ‘권리는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동권을 법률로 명시했다는 것은 장애인들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 당연히 ‘요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김 시장은 원주 장애인들의 정당한 ‘국민된 요구’를 무시한 것도 모자라, 이들을 ‘국민된 도리도 모르는’ 무도한 집단으로 매도하고,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국민이 부여한 자신의 의무’를 내팽개쳐버렸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자신을 치장했지만, 이는 결국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권리’를 ‘시혜’로 변질시켰다.
모두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해야 할 대중교통에서 왜 장애인은 배제돼야 하는가. 스스로 먹고 씻고 입고 이동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이 감옥과 같은 수용시설에서 격리되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왜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몫인가.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다.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예산을 부담하기 싫다는 것인가. 천박하고 냉혈적인 자본의 칼을 ‘국민된 도리’라는 말로 은폐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전쟁 수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보다 먼저 장애인을 가스실로 보내버린 역사를 이 사회는 기억하고 있는가. 장애인의 문제를 그렇게 처리해버리는 것이 깨끗한가. 승전국인 미국조차도 장애인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장애인에 대한 태도는 여전히 어디서나 시혜와 동정, 지역사회에서의 격리와 배제라는 차별로 재생산되고 있다.
원주시장의 말은 어쩌면 이 사회가 장애인을 생각하는 전반적인 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름이 끼친다. 야만의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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