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기록할 만한 단잠과 기억할 만한 아침은 모두 ‘친구네 집’에서 나왔다. 이를테면 스무 살 무렵, 명지대 근처의 그 집. 부산 출신 친구 2명이 함께 살던 그 집의 침대 2개를 붙여놓은 방에서 가로로 단짝 친구 넷이 나란히 누워 자곤 했다. 떡볶이를 만들어 기껏해야 맥주 한두 캔을 곁들여 먹고는 고만고만한 고민거리를 툭 내뱉다가,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거리다가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친구들이 아침 수업에 들어가며 내 머리맡에 열쇠와 함께 김정란의 ‘스타카토 내 인생’ 같은 시를 적어 놔두고 가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기질이 우울하고 고민을 만들어서도 하고, 나를 둘러싼 환경에 반항심은 많았던 나의 한 시절을 말랑말랑하게 만든 것은 그 집의 기억이다.
한 해가 갈수록 인생이 더욱 하드코어가 되어갔다. 가족을 유독 견디기 힘들던 날, 친한 언니는 ‘난 바쁘지만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라고 했다. 언니는 책상에 앉아 논문을 쓰고 나는 침대에 누워 소리 죽여 울었다. 언니는 모르는 척, 그냥 자기 할 일을 하고 자기가 먹던 음식을 내주고, 내가 거기 없는 척 굴었다. 그때 알았다. 그저 나와 지긋지긋하게 얽혀 있던 공간과 사람들을 떠나 다른 사람이 만들어내는 무심한 리듬에 편입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걸. 내게 행운이었는지 몰라도,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대개 선뜻 침대나 바닥을 내주었고, 유별나게 잘해주지도 귀찮아하지도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해주었다. 그 거리만큼 나는 내 문제와도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내겐 낯선 공간에서 편안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보는 건, 외롭지도 속박되지도 않는, 고양이와 함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 맞는 아침은 뭔가 달랐다. 서로의 부스스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백마디 말을 한 것보다 가까워졌다. 아파트인 우리 집에선 들을 수 없는,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하염없이 듣기도 했다. 창문을 열었을 때, 그때까지 나한테 몰두하느라 핀 줄도 몰랐던 벚꽃을 발견하기도 했다. 새로운 눈과 귀가 주어진 것 같은 아침들이었다.
그러니까 친구네 집에서 잔다는 건 아주 짧은 공동체의 형성 혹은 아주 간략한 형태의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혜택을 쏠쏠하게 누리고 산 사람으로서 제안하고 싶다. 유독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면,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갈래?”라고 이야기해보자. 맛있는 음식도 질펀한 술판도 없이, 눈물도 웃음도 없이 무심한 태도로, ‘따로 또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김지현 작가*‘레디 액션!’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소소한 제안을 하는 코너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액션’을 원고지 6~7장 분량으로 써서 han21@hani.co.kr로 보내주세요. 레디 액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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