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변의 모든 것을 휘감으며 자라나는 쿠카멜론.
지난달까지는 연락하는 사람마다 배추 이야기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넌 몇 포기나 살았니?” “우리는 세 번에 걸쳐 600포기는 심었을 텐데 살아남은 게 별로 없지 뭐야.”
주변에서 배추 농사가 어렵다는 소식이 어마어마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9월 초 처음 심은 배추가 일주일 만에 죽어버려 열흘 뒤 다시 심은 것까지 합치면 60포기는 심었다. 모두 한껏 오른 지열에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거나 벌레에게 먹혔다. 그중 자리가 마땅치 않아 남은 모종 몇 포기를 가지 밑에 주르륵 심었는데 그 몇 포기만 겨우 살아남았다. 내가 심은 건 배추가 아니라 개복치였을까? 차라리 추석이 지나고 심었다면 잘 자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배추를 다시 심기에는 모종이 없다. 배추가 잠시 머물렀던 자리에는 얄궂게도 음식물쓰레기 퇴비에서 틔웠을 참외 몇 포기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10월이 되자 거짓말처럼 가을이 됐지만 여전히 여름작물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기후위기에는 실험 정신이 필요한 것일까? 올해는 가지과 작물을 한 달 일찍 4월 중순에 심었는데 이제는 나무처럼 번쩍번쩍 크게 자랐다. 역대 최대 크기다. 노린재를 생각하면 늦게 심어야 할지, 올해처럼 일찍 심어서 나무처럼 키워야 할지 고민이다. 2024년 2월 마르쉐 포럼에서 발제한 전남 해남 태평농원의 강태양 농민은 몇 년째 봄 가뭄이 너무 심해 가지과 작물은 오히려 가뭄이 지나고 늦게 정식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밭의 적당한 시기는 언제일까? 번거롭지만 2025년에는 4월에 정식하는 모종과 5~6월 가뭄 이후 정식하는 모종을 나눠서 심어보는 것이 좋겠다.
가지과 말고도 나름대로 실험해본 게 하나 더 있다. 배추를 심을 때 오이 모종도 두 포기 심었다. 여름이 더 길어질 테니 때늦은 오이를 심어도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반은 성공했다. 여름처럼 실하진 않지만 정말 오이가 달리긴 하니까. 오이가 부실해진 데는 뜻밖의 불청객도 한몫했다. 맛은 오이랑 비슷한 작물인데 훨씬 작고 시큼한 맛이 나는 미니 오이 ‘쿠카멜론’이다. 오이 앞으로 감고 올라가라고 철망을 설치해놨는데 어느새 쿠카멜론이 자연 발아하더니 무섭게 자라나 오이를 밀어내며 초록색 벽을 만들었다. 2023년 친구 이파람에게 모종을 얻어 여름 내내 따먹었던 녀석이다. 담쟁이덩굴처럼 빈틈없이 빽빽하게 자라 방울토마토보다 작은 열매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데 2023년 여름에는 꼭 쿠카멜론의 노예라도 된 기분이었다. 쉴 틈 없는 수확에 지쳐 2024년에는 정말로 쉬어야지 했는데 배추가 떠난 공백에 알아서 싹을 틔워 채우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아아, 농사는 사람이 짓는 것 같아도 사람 혼자서는 반쪽짜리구나. 배추는 없지만 쿠카멜론과 기를 못 펴는 오이에 자글자글 달리는 고추를 따서 집으로 돌아간다.
쿠카멜론과 고추는 팔팔 끓인 단촛물에 던져놓고 아직 한낮은 여름 같으니 오이를 숭덩숭덩 잘라 진토닉에 넣어준다. 아직도 밭에 나가면 모기에 다섯 방도 넘게 물리지만 진토닉의 향을 약간 끌어올려주는 이 오이 맛은 농사짓는 자만의 특권이다. 아무리 날씨에 좌절해도 농사짓기 참 잘했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세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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