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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품의 환영



레디메이드 미술의 시작을 알린 마르셀 뒤샹의 <샘>…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1917년작 <샘>을 찍은 사진이거나 이후에 다시 만든 <샘>
등록 2010-11-03 17:59 수정 2020-05-03 04:26
마르셀 뒤샹의 1964년작 <샘>을 찍은 사진. 1917년 <샘>을 재연한 <샘>을 재현한 사진인 셈이다.

마르셀 뒤샹의 1964년작 <샘>을 찍은 사진. 1917년 <샘>을 재연한 <샘>을 재현한 사진인 셈이다.

1917년 프랑스인 미술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레디메이드 소변기에 ‘R. 머트’(R. Mutt)란 필명으로 서명한 뒤 (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뉴욕에서 개막하는 ‘독립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은 출품이 바로 기각돼 출품자의 주소로 반송됐는데, 흥미롭게도 작품 전시를 거부한 사람은 전시의 운영위원인 뒤샹 자신이었다.

이후 뒤샹은 뉴욕 다다이스트 예술가들의 기관지인 (The Blind Man) 제2호가 에 관한 논쟁을 다루도록 꾸몄고, 결국 뒤샹의 소변기는 레디메이드 미학을 대표하는 문제적 사례가 됐다. 하지만 이 물품을 직접 본 사람은 몇몇 지인과 동료 예술가뿐이었고, 원본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1917년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촬영한 흑백사진과 후일 뒤샹의 승인 아래 제작된 복제품들뿐이다.

을 촬영한 스티글리츠의 원본 사진을 보면, 작품에 붙은 작품 명세서를 확인할 수 있다. 제목은 ‘Fountain’, 출품자는 ‘Richard Mutt’, 주소는 ‘110-West-88th-St.’라고 반듯하게 적었다. 뒤샹 본인의 필체다. ‘110 웨스트 88번가’는, 이 작품을 ‘화장실의 부처’(Buddha of the Bathroom)라고 불러 논란을 가중한 루이즈 노턴 바레즈(작곡가 에드가르 바레즈의 부인)의 집 주소다. (이 사진을 촬영할 때 사진가가 배경으로 활용한 것은, 얄망궂게도 미국인 화가 마스던 하틀리의 그림 (The Warriors)이었다. 동성애자인 하틀리는 작품에 남성과 군복(주로 독일군 장교)에 대한 페티시를 담기로 악명이 높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은 1950·1953·1963·1964년 네 차례에 걸쳐 다시 제작됐고, 총 15점이 현전한다. 1950·1953·1963년엔 뒤샹의 감독 아래 ‘유사 기성품 소변기에 서명을 한 복제품’을 각 한 점씩 마련한 모양인데, 작업자가 누군지는 알려진 바 없다.

반면 1964년에 재제작된 의 소변기는, 1917년의 원본과 달리, 레디메이드가 아니다. 반복을 싫어한 뒤샹은, 이번엔 ‘철물점에서 기성품 소변기를 사다가 서명하는 일’을 거부했다. 대신 ‘슈바르츠 화랑’(Galleria Schwarz)을 통해 이탈리아의 도자 공방에 복제품 제작을 의뢰했고, 최종적으로 8점의 에디션에 직접 서명했다. (같은 해에 동일한 방식으로 4점- 작가 소장용으로 하나, 화상 아르투로 슈바르츠의 몫으로 하나, 그리고 미술관 순회전용으로 둘- 이 더 제작됐다. 1964년의 복제품 바닥엔 이런 제작 사항을 새긴 동판이 부착됐다.)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은 대부분 1964년의 복제품이다. 고로,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은 전통적 눈속임 미술, 즉 재현 예술품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레디메이드 아트를 증언하는 역할을, 그것의 환영 혹은 유령이 맡은 꼴이다.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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